[서상희의 쉰셔널지오그래픽] 슬픔을 자랑합니다

  • 서상희 크레텍 이사·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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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5-06 17:13  |  수정 2026-05-07 10:12  |  발행일 2026-05-08
지난달 지리산 노고단의 풍경. 슬픔을 말리는 일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산길을 걷거나 시골장에서 제철 나물을 사거나, 안개 낀 숲길을 걷거나, 이 모든 일상에 집중하다보면 언젠가는 평안에 다다르겠지. <본인 촬영>

지난달 지리산 노고단의 풍경. 슬픔을 말리는 일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산길을 걷거나 시골장에서 제철 나물을 사거나, 안개 낀 숲길을 걷거나, 이 모든 일상에 집중하다보면 언젠가는 평안에 다다르겠지. <본인 촬영>

"슬픔을 자랑합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건/ 아름다운 마음이야/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어라/ 아주 예쁜 돌이 된단다/ (중략) 흐린 날도 화창한 날도 시린 날도/ 끼우고 나면 다 퍼즐이 될 거야"(악뮤 노래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 중에서)


독한 자극만이 난무하는 시대에 최근 나온 악뮤의 노래들은 달랐다. 순하고 순수하고, 뭐랄까, 조금 더 한 발 떨어져 인생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이 청춘들이 만든 노래에 쉰 줄의 나도 눈을 적시며 듣고 또 들었다.


유튜브로 노래를 듣다 보면 또 하나 눈길이 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아래에 달린 댓글들이다. 다들 노래를 들으며 각자의 인생들을 올려놨다. 어떤 이는 군에서 사고로 한 손을 잃었고, 또 어떤 이는 젊은 나이에 암과 싸우고 있었다. 예쁜 아이가 태어나자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는 초보 아빠의 눈물부터 그냥 죽고만 싶다는 중2 여학생, 심지어 친족의 성폭력으로 평생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로 살다 처음으로 이사하는 날 '노래를 들으며 힘을 내고 있다'는 사연까지, 수많은 인생들이 영화의 스크롤처럼 댓글로 올라가고 있었다.


2022년 여름 아일랜드 더블린의 제임슨 위스키 양조장의 비석들. 환희를 만드는 술과 상실의 묘지가 같이 있다. 기쁨과 슬픔은 등을 맞댄 한쌍일까. <본인 촬영>

2022년 여름 아일랜드 더블린의 제임슨 위스키 양조장의 비석들. 환희를 만드는 술과 상실의 묘지가 같이 있다. 기쁨과 슬픔은 등을 맞댄 한쌍일까. <본인 촬영>

난 노래를 듣고 사연을 읽으며 펑펑 울었다. 이 모든 것을 지나 우리는 인생을 사는구나. 우리 인생 하나 만들려고, 이렇게 눈도 오고 벼락도 치고 산 넘어 계곡에 넘어졌다 기어이 풍경을 이루는구나. 어영부영했던 내 인생도 불쌍하고, 갖가지 굴곡진 남의 인생도 불쌍하고,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우리 본질이구나. 예전의 나는 자존심이라는 딱딱한 껍질로 이 슬픔을 밀봉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특히 이 노래를 듣고 댓글들을 읽으면서는 슬픔이나 고통도 부끄럽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됐다.


시쳇말로 내 나이쯤 되면 자식자랑이나 재산자랑 할 수 있으면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슬픔도 인생의 한 궤로 자리한다는 걸 느끼면서 슬픔을 자랑하고 싶어졌다. 내 슬픔들을 햇볕에 내어놓으면 눅눅한 곰팡이는 공기 중에 올라가 버리고 바짝 마른 풀처럼 오롯이 자립할 수 있을까. 세상에 홀로 선 내 슬픔을 자랑할 수 있을까.


2024년 여름 파리 피노 컬렉션에 전시된 한국 작가 김수자의 보자기 전. 어머니의 바느질에서 영감을 받아 인생 희로애락 모든 것을 묵묵히 감싸는 걸로 표현하고 있다. <본인 촬영>

2024년 여름 파리 피노 컬렉션에 전시된 한국 작가 김수자의 보자기 전. 어머니의 바느질에서 영감을 받아 인생 희로애락 모든 것을 묵묵히 감싸는 걸로 표현하고 있다. <본인 촬영>

독일 뮌헨의 안개 낀 거리 슈바빙에서 낙엽처럼 슬픔과 고독을 진열했던 작가 전혜린. 그의 책 어디선가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내게도 카타스트로프(비극·재난)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구절을 난 참 좋아했다. 실제로 비극 같은 삶을 갈망한 게 아니라, 미친 듯이 뜨겁게 살고 싶다는 나만의 명제였다. 그 이루지 못한 꿈의 선상에서 내 슬픔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불쌍한 내 엄마는 힘든 인생의 슬픔받이로 나를 택했다. 심리학 용어로 감정쓰레기통이라 한다지. 쓸모를 거부하자 인정머리 없는 못된 년이 되었지만, 지하실의 엄마와는 이별하고 햇볕에서만 만나기로 했다. 그 묻어둔 엄마는 내내 나의 아픔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육친의 정'이 처음으로 사무쳤다. 묘소를 찾아 펑펑 우는데 하얀 나비가 주변을 맴돌았다. 할머니 오셨구나. 대로변까지 따라와 배웅하는 그날의 나비에게 '꼭 잘 살겠다'고 답을 했다. 존경하는 형부가 병원 연구용으로 시신을 기증하고 돌아가셨을 때, 나는 영정 앞에 엎어져 울었다. 양말값 한 켤레도 아끼던 형부는 집에 놀러 온 내 딸의 친구들을 줄 세워 용돈을 주셨다. '아이에겐 차별하는 게 아니다.' 결혼이라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내게 아빠는 말씀하셨지. "괜찮다. 아직 아빠 살아있다." 그 아빠는 지금 치매로 투병 중이시지만, 돌아갈 곳을 주신 덕분에 여전히 나의 가정은 건재하다.


이렇듯 내 슬픔들을 하나씩 호명하며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게 해봤다. 부끄러움의 그늘을 벗어난 나의 슬픔들이 비로소 자유롭게 숨을 쉰다.


영화 맨체스터바이더씨의 한 장면. 비록 상처가 치유되지 않더라도 슬픔을 옆에 둔 채 조금씩 숨 쉬며 살아가는 일상의 위로법을 전한다. <더픽처스 제공>

영화 '맨체스터바이더씨'의 한 장면. 비록 상처가 치유되지 않더라도 슬픔을 옆에 둔 채 조금씩 숨 쉬며 살아가는 일상의 위로법을 전한다. <더픽처스 제공>

"슬픔은 말해지지 않을 때, 꽉 찬 심장을 짓눌러 그것을 터뜨리고 만다. 그러니 슬픔에게 말을 가르쳐라."(윌리엄 셰익스피어 희곡 '맥베스' 중에서)


나는 이제 나의 슬픔에게 '자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려 한다. 슬픔은 결코 패배의 흔적이 아닐 것이다. 치열하게 삶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뿐. 문학은 상실을 언어로 번역해 자신의 상처를 보편으로 치환케 한다. 미술은 슬픔에 색과 형체를 부여한다. 음악은 파동을 통해 감정을 끌어낸다. 예술이란 것은 슬픔을 내놓으려고 작정하고 만든 통로가 아닐까. 인류는 오랫동안 예술을 빌려 격렬하게 슬픔을 자랑해왔던 것이다.


슬픔을 더 나열하고 싶지만 여러 관계자들의 이해관계 속에 일단 여기까지만 자랑한다. 그 위를 딛고 다시 한 번 더 꼿꼿이 선다. 올여름 장마가 오기 전 슬픔 다 꺼내 말리시길. 풀내 흙내 나는 들판에서 작정하고 아주 단단하게 말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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