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갈비골목, 한강 이남 최고의 '갈비 왕국'이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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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11   |  발행일 2020-09-11 제33면   |  수정 2020-09-11
■ 대구 소갈비 이야기
농사 동력이자 家寶 소, 조선땐 도축금지령
1920년대 평양서 肉牛 등장 후 남쪽에 전파
6·25전쟁때 경상도권 다양한 갈비문화 파생
갈비보다 상대적으로 쌌던 불고기 끼워 팔며
계산동 '땅집' 시작으로 네임드 갈빗집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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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소갈비문화는 일제강점기부터 대중화의 길을 걸었지만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전국 각처에 갈비전문점이 우후죽순 들어서게 된다. 고가의 갈비 옆에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호주머니 사정이 안좋은 서민들도 사먹을 수 있는 불고기가 붙어다니게 된다.

乫非(갈비). 조선 인조 17년(1639) 6월24일자 '승정원일기'에 그 단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조선조는 '소고기 금지구역'이었다. 1970년부터 시판되기 시작한 경운기·트랙터 등이 없어 소 없이는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주 동력원인 일하는 소는 가보(家寶)여서 잡아먹어라 해도 절대 잡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소고깃국은 언감생심. 조정에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소 도축금지령'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침을 달고다니는 미식가 양반들은 삼삼오오 숯불화로 옆에 모여 조선버전의 양념갈비 같은 '설야멱(雪夜覓)'를 구워먹었다. 궁중 수랏상에도 갈비찜이 올라간다.

일제강점기부터 냉면과 갈비문화가 엮이게 된다. 거기에 '꿈의 조미료'라고 할 수 있는 '아지노모도'가 1918년 일본에서 개발돼 고기 맛을 더욱 감미롭게 만든다. 1929년 9월27일자 당시 종합잡지 '별건곤'을 보면 중구 전동의 한 대구탕(대구식 육개장)집에서 갈비를 구워판다는 대목이 나온다. 1920년대 중반 이미 평양에는 일소가 아닌 육우로 분류된 '평양우'까지 등장한다. 점차 북한의 해주·사리원 등에서 발흥한 너비아니(불고기) 문화가 남한으로 전파된다. 6·25전쟁 때 경상도권에 다양한 갈비문화를 파생시키게 된다. 갈빗집에서는 어김없이 불고기도 팔았다. 갈비는 비쌌고 불고기는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대중까지 단골로 포섭하기 위해 불고기도 끼워팔 수밖에 없었다.

소갈비와 불고기 발전의 두 축은 서울 못지 않게 대구와 부산의 저력을 기억해야 된다. 부산은 해운대 소문난암소갈비(1964년 오픈)로 붐업되고 대구는 중구 계산동 '땅집'이 그 진원이다. 이후 대구는 이 불고기 붐을 타고 한강 이남 최강세를 유지했던 '동산동 갈비골목'이 '갈비구이 특화거리'로 정착된다.

하지만 일본의 소고기문화는 우리보다 늦었다. 1965년 열린 도쿄올림픽 이전까지만 해도 '육식금지국가'. 한국과 달리 갈비문화를 운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후 일본 정부는 '일본인의 체격이 너무 왜소한 게 단백질 부족'이라는 미국 영양학회의 지적을 존중해 육식을 허용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한국식 불고기와 비슷한 '야키니쿠(燒肉)'가 특수를 일으킨다.

'음식강산'이란 책을 통해 한국 갈비 생태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리한 바 있는 음식기원연구가인 박정배씨에게 전화인터뷰를 요청했다. 그가 한국갈비지형도를 알려준다. 대구·부산 못지않게 수원갈비도 빨랐다. 수원 싸전거리에 있었던 '화춘옥'이 리더격이다. 이 집은 수원갈비의 대명사로 인정받는데 원래 해장국집으로 출발했다. 1950년대 중반에 출발했는데 여기 갈비는 유달리 길다. 그 길이가 12㎝, 그래서 '왕갈비'로 불린다. 별도 양념을 가미하지 않고 그냥 소금간으로 구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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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13개의 갈비를 제대로 장만하려면 사바키질 전문가가 병풍펴기를 통해 갈비살을 잘 저며야 된다. 갈비살도 저급부터 고급이 있고 어떻게 썰어내느냐에 따라 맛도 많이 달라진다. 칼의 각도가 곧 맛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것이다.

갈비에 붙은 살에 지그재그 칼집을 넣는 '다이아몬드 커팅'의 발상지인 부산. 52년 부산 일간지에 '암소갈비전문'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국제시장 안 신창동 3가 '평양갈비'도 갈비의 저력을 가진 곳이다.

1976년 서울 강남에서 오픈한 '삼원가든'은 가든형 갈비문화의 선두주자다. 이후 포천 이동갈비, 벽제갈비 등이 붐을 일으켰고 대구도 그 흐름에 화답하며 대명사급 식당들이 우후죽순 일어선다. 57년 계산동 땅집, 60년 진갈비, 71년 신성가든, 72년 대창가든, 70년대초 한일가든, 74년 제주옥(훗날 제주가든)과 성주식당, 70년대 중반 오륙도, 77년 부일갈비, 81년 한국가든, 82년 앞산가든, 84년 늘봄가든, 85년 가야동산, 80년대초 경북가든과 한솔가든, 만포장, 그리고 70~80년대와 이별을 고하게 만든 무시한 구이집이 등장한다. 기존 대구의 등심문화를 갈비살문화로 돌변시킨 비원과 안압정이다. 엄청난 수요와 인프라를 구축했다. 저들 빛나는 업소들 때문에 60~80년대 대구의 갈비문화는 '명불허전'이란 소릴 들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한국 첫 갈비골목으로 한시절을 풍미했던 동산동 갈비골목으로 발길을 돌린다.

글·사진= 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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