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대루라는 이름은 시성 두보의 '백제성루(白帝城樓)' 중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만대루는 평상시에는 건물 왼쪽 부분이 약간 기울어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입을 억제한다. 만대루 상층 |
지난 2월. 구글은 온라인 예술 감상 플랫폼인 '아츠앤컬처'를 통해 인공지능(AI)으로 칸딘스키가 작품을 그릴 때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당시의 소리를 재구현해냈다고 발표했다. 선명한 색채를 활용해 음악적 느낌이 나는 추상화를 많이 그린 칸딘스키의 작품 중 1925년 작 '노랑, 빨강, 파랑'이 대상이다. 이 그림을 그릴 때의 음악을 구글 마젠타에 학습시켜 그림을 그리며 들었을 음악으로 구현해 낸 것. 구글은 왜 멀쩡한 그림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할까. 명확한 답은 없다. 칸딘스키가 늘 주창해온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다가가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칸딘스키는 색과 선으로 점철된 그의 작품에 대해 자주 "내 앞에는 선명한 색이 있고 거친 그리고 미친 선들이 있었다"고 했다. 100년 후 구글이 첨단 문명인 인공지능을 동원해 그의 거친 선과 미친 선을 탐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으랴.
나는 지금 칸딘스키를 품고 무한한 움직임의 가능성을 지닌 가장 간결한 형태의 자유로운 직선과 성숙과 유연성을 지닌 완숙된 울림인 곡선의 하모니를 찾는 '선의 여행길'에 나선다.
만대루 상층(위)·하층 전경. |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톨게이트를 나와 왼쪽 병산서원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풍산읍을 지나 하회마을로 달리다 중리삼거리와 만난다. 오른쪽이 하회쪽이고 왼쪽으로 가야 병산서원이다. 왼편으로는 넓은 풍산들이 낙동강 좁다란 지류들을 사이에 두고 광활하게 펼쳐진다.
병산서원은 여기서 십리 길 조금 넘는다. 길은 이내 울퉁불퉁 비포장이다. 병산서원까지는 아직 2.6㎞. 패인 길 곳곳에 공사 안내 표지물이 보인다. 서원 600여곒를 남기고 황톳길로 여름 전에 포장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병산서원 가는 비포장 길을 두고 시시비비가 많았다. 포장은 편리한데 유가의 전통스러움에 누가 될 수가 있다. 반면 국내외 많은 관광객의 접근성을 감안한다면 친환경 포장도 나름 이유가 있을 터. 아무튼 이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유명해지다보니 포장에 힘이 실린 모양이다. 비포장의 운치를 만끽하려면 지금 부지런히 다녀 두어야 할 것 같다. 먼지 폴폴 날리는 길. 낙동강 지류와 몇 굽이 만났다 헤어지고 또 만나다 보면 솔 숲 사이로 백사장이 눈에 들어온다. 병산 아래 강물은 수량이 넉넉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찰랑인다. 강변 모래들이 조알대는 모습이 하도 천진난만 해 발 딛기가 미안할 지경이다.
병산서원은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화산(꽃뫼)에서 강 쪽으로 경사진 구릉에 넓게 자릴 잡았다. 솟을대문인 복례문에 들기 전 넓은 마당을 만난다. 제법 굵은 목백일홍(배롱나무) 수십 주는 만대루와 함께 멋진 포토존이다. 머리 숙여 예를 갖춘 뒤 복례문을 지나면 만대루(晩對樓)와 직면한다. 이 누각은 2층 구조다. 빛바랜 기둥에서 스며나온 쩌렁한 고풍(古風)의 울림이 벅차고 예사롭지가 않다. 지난해 강 건너 발생한 산불로 자칫 큰 피해를 입을 뻔 했지만 전혀 내색이 없다. 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만대루 아래층으로 내려와 아름 기둥들을 안아 본다. 성글게 깎은 덤벙주초 옆에 정으로 잘 깎은 잔돌을 빙 둘러가며 가지런히 박아 기둥을 더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대부분 잡목이지만 생긴 모양이 너무나 자유롭다. 휘어도 전혀 구김살 없다. 뒤틀려 휘어 오르면 미운 게 상정일 테지만 만대루 아래층 기둥들은 괘이치 않는다. 있는 대로 생긴 그대로다. 민흘림이니 배흘림이니 하고 따질 것도 없다. 그냥 흘림이다. 아래가 좀 더 굵어 보이고 더 안정돼 보이고 그래서 더 정직해 보인다.
◆만대루 선의 미학
다시 만대루 위층으로 오른다. 평상시에는 건물 왼쪽 부분이 약간 기울어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입을 억제한다. 만대루로 오르는 두 개의 통나무 계단도 오늘 따라 너무 무거워 보인다. 수입목 탓일까. 이 무게가 결코 만대루에겐 가볍지 않을 것 같다.
만대루에 오르자 사방이 탁 트인다. 눈도 트이고 가슴도 트인다. 정면 일곱 칸에 측면 두 칸. 그런데 가운데 기둥이 없다. 기둥은 모두 소나무. 그 시절에는 100여명의 젊은 유생들이 공부에 몰두했을 터. 최근 동쪽 대들보 아래 매단 북이 좀 생뚱맞다. 유생들 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걸 울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용도란다.
만대루라는 이름은 시성 두보의 '백제성루(白帝城樓)' 중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사실 백제성은 삼국지 유비가 최후를 맞은 곳으로 유명하다. 성의 절벽 위 누대를 바라보며 지었다고 한다. '푸른 절벽은 늦을 저녁에 마주 대할 만하다'했으니 만대루의 진미 또한 낙동강 해질녘이 딱일 것 같다.
휘어진 통나무 대들보의 곡선은 위로부터 육중한 위엄을 가차 없이 내리며 가지런한 직선의 소나무 기둥과 희한한 조화를 이룬다. 만대루 위층 공간의 기하학적 운치 때문에 자연히 학문의 열기가 더욱 더 고양(高揚)됐을 것이다.
김채한(전 달성문화재단대표이사) |
목수 신영훈이 만대루를 두고 한 말씀을 포개신다. "우리 문화에는 언제나 직선과 곡선이 함께 하지요. 나무도 직선과 곡선이 함께 있어야 천년을 견딘답니다." 만대루를 두고 한 말이다.
글 =김채한(전 달성문화재단대표이사)
사진 =배원태(사진작가)
류한욱 병산서원별유사
병산서원별유사 류한욱(71·하회마을보존회장·사진)씨는 만대루가 국가보물로 지정된 것에 엄청난 자부심과 책임의식을 가진다고 말했다. "병산서원 전체에 아직 이렇다 할 국보급 문화재 지정이 없어 늘 서운하던 차에 이번에 쾌거를 이뤘다" 며 환하게 웃는다. 15년여 전부터 당국에 신청했지만 번번이 누락됐기에 그는 내심 섭섭함이 많았는데 이제 한숨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만대루에 앉자마자 병산서원에 관해 열변을 토한다. 인재를 양성하고 제향을 받드는 기능을 지닌 우리나라 서원이 시대의 변천에 어쩔 수 없이 인재 양성 기능은 없어지고 제향만 받드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병산서원은 여전히 교육기능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1947년 병산교육재단을 설립하고 병산중학을 풍산읍에 개교했지요. 현재의 풍산중·고교가 전신입니다. 이미 중학은 72회, 고교는 53회 졸업생을 배출했어요. 최근에는 서원스테이도 열어 서애 류성룡 선생의 향학열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육적인 측면에서 더욱 열정을 다해 교육관이나 박물관 등을 조성할 모양이다. 특히 존덕사 입구 외삼문 팔괘는 다른 서원에는 없는 형태다. "이 팔괘는 임란을 당하기 전후에 서애 선생이 겪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말해주고 있어 주역 관련 자료들을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한 병산서원 무궁화도 과학적인 사료들을 점검해 복원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했다. 병산서원 무궁화는 입교당 앞 뜨락에 심겨진 것으로 일제 때 수난을 당해 지금은 명맥이 끊긴 상태다.
이밖에도 그는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올렸던 만인소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며 "유네스코세계유산 등재에 따른 병산서원의 위상에 걸맞는 일들을 열심히 찾아 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대루의 하층과 상층의 기둥과 대들보의 곡선은 세계적인 걸작"이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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