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엽의 한자마당] 공상 속 아리코 왕국...한자와 한자어 뜻을 모르고 우리말과 글로 충분할까

  • 이경엽 한자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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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15   |  발행일 2021-10-15 제38면   |  수정 2021-10-15 08:43

나랏말싸미

한글날을 보내며 '공상 속 아리코 왕국'을생각한다. 아리코는 잉글랜드의 동쪽에 있다. 어느 날 아리코 왕국의 쓰리벨 대왕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서를 발표했다. '나라의 말이 영국과 달라 영어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바야흐로 영국이 세계를 제패해 해가 지는 날이 없는 대제국의 위세를 떨치던 때였다.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전하, 우리가 어찌 감히 영어를 버리고 대영제국의 영향권 밖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영어를 버리고 새 문자를 쓰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일 뿐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위대한 왕이 돌아간 후 수백여 년이 지났으나 아리코 왕국은 아직 문자의 사용을 둘러싸고 논쟁이 격렬하다. 쓰리벨 대왕이 만든 문자는 세계 최고의 과학적 문자로서 아리코 왕국의 자랑이며 세계 언어학자 중에 이를 극찬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아리코 문자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의 수는 압도적이다. 반면 아리코 말의 70%는 영어 낱말이므로 아리코 문자와 영어를 섞어 쓰거나 영어를 괄호 안에 적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뿐만 아니다. 영어 낱말을 아리코 문자로 적되 영어 낱말을 알지 못하면 아리코 말은 한갓 기호들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컴퓨터를 가리켜 아리코 문자로 '컴퓨터(나는 아리코 문자를 모른다. 편의상 한글로 적는다)'라 쓰되 결단코 'C·O·M·P·U·T·E·R'란 알파벳을 적거나 'COMPUTER'로 발음해선 안 된다는 것이 아리코 문자 전용론자들의 강경한 주장이다. 쓰지 않으니 알파벳과 영어를 배울 필요도 없다. 필요하면 영어는 외국어로 배우고 쓰면 될 뿐 아리코 말과 함께 써서 아리코 말을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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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어에서 유래한 아리코 낱말은 영어를 알 때 비로소 분명해지므로 아리코 문자와 알파벳을 함께 쓰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알파벳을 함께 쓰는 것은 쓰리벨 대왕의 업적을 훼손하는 것이므로, 영어 낱말을 반드시 배우되 표기는 아리코 문자로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다. 영어에 뿌리를 둔 낱말을 쓰면서 영어와 알파벳을 버리라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백성이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니 쓰리벨 대왕의 고귀한 뜻을 거스르게 된다는 것이다.

COMPUTER를 몰라도 '컴퓨터'만 알면 된다. 'SCHOOL'과 'BUS'는 몰라도 '스쿨 버스'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 'SCIENCE'를 왜 알아야 하나? '사이언스'로 충분하다. 'FINANCIAL'은 절대 외우지 마라. 시간이 아깝다. '파이낸셜'로 잘 통하지 않는가.

한자와 한자어의 뜻을 모르고도 우리말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주장과 영어 낱말을 몰라도 아리코 말을 풍성히 할 수 있다는 주장을 생각하며 우리의 말글 생활을 고민해 본다. 나만큼 심각한 어느 아리코 사람의 독백이 귓전에 맴돈다. "라이프는 쇼트하고 아트는 롱하다."
이경엽 한자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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