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정영상문학전집: 감꽃과 주현이, 섬세하고 따뜻하게…글로 그린 '두엄같은 삶'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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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7-14  |  수정 2023-07-14 08:08  |  발행일 2023-07-14 제15면
포항출신 정영상 시인 30주기 추모 문학전집
詩 255편과 유년 이야기 담은 산문 18편 실려

정영상
33세 시절의 정영상 시인. '두엄' 같은 삶을 살다 1993년 37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아시아 제공〉
정영상문학전집-표지
정영상 저/이대환 편/아시아/508쪽/2만7천원

"소나 돼지들의 똥과 오줌을/ 쓰라린 속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끌어당기며 사는 것들/ 그리하여 쉬지 않고/ 오로지 썩는 일에만 몰두하여/ 겨울에도 뻘뻘 땀 흘리며/ 썩으면 썩을수록 더욱 정신 차려/ 논 밭으로 나가/ 쓰라린 속이 기쁨으로/ 열매 맺힐 때까지 사는 것들"('두엄' 전문)

'두엄' 같은 삶을 살다 37세에 미완의 생을 마친 정영상(1956~1993) 시인의 30주기 추모 문학전집이 나왔다. 정 시인은 1956년 경북 포항시 대송면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포항고 시절부터 시와 인연을 맺었다. 국립 공주사범대학(현 공주대) 미술과로 진학해 '율문학' 동인으로 활동했고 졸업 후 경북 안동으로 발령받아 교편을 잡았다. 1984년 '삶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와 1989년 첫 시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를 펴냈다. 그해 8월 안동 복주여자중에서 재직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련으로 해직됐다. 이후 부인이 교사로 재직하는 충북 단양의 자택으로 옮겨 두 번째 시집 '슬픈 눈'을 펴냈다. 안타깝게도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1993년 12월 유고 산문집 '성냥개비에 관한 추억', 1994년 1월 유고 시집 '물인 듯 불인 듯 바람인 듯'이 출간됐다. 2003년 4월 '정영상 시비'가 공주대 교정에 세워졌다.

이번 추모집에는 그의 시집 3권에 실린 시 255편과 유년의 이야기를 담은 산문 18편을 실었다. 시인의 추모집이지만 그의 삶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산문을 책 앞쪽에 배치했다. 산문에서는 정 시인의 어린 시절과 그의 고향 풍경이 정감있게 드러난다.

"볏짚은 따뜻했다. 형이 입던 교복 바지 떨어진 것이나 아버지가 입던 헌 바지를 내복 대신 속에다 하나 더 껴입던 시절이라 아랫도리에 바람이 썰렁하게 지나갔던 우리들의 겨울, 볏짚은 따뜻했다."(산문 '볏짚' 부분)

정 시인의 '볏짚'은 맵찬 겨울철 헐벗은 아이들의 포근한 놀이터가 되고, 쇠죽가마솥 아궁이의 불길이 된다. 또 가난한 농부의 부지런한 손에서 가마니로 거듭나 귀하디 귀한 현찰이 되기도 한다.

산문에 이어 실린 시편들은 시집 3권의 출간 순서를 그대로 따랐다. 문학평론가 권순긍 세명대 명예교수의 '정영상론'으로 추모집은 마무리된다.

신경림 시인은 발문에서 "글 어느 한 편을 읽어도 한 자 한 자 박아 쓴 장인의 손끝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는 본디 그림이 전공이기도 하지만 이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원고지 위에 글을 가지고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빠졌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귓가에서 소곤소곤 들려주는 것 같은 나무와 벌레와 작은 것들에 대한 섬세하고도 따뜻한 얘기들은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고 밝혔다.

정 시인의 부인인 박원경 교사는 "그는 물 같은 사람이고 동시에 불 같은 사람이었다. 가슴속에는 늘 출렁출렁 감정의 물결을 담고 있다가 누가 장난으로 돌팔매질 하나라도 하면 불같이 일어나 사랑하고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추모집을 엮은 이대환 소설가는 "서른 해 지나서 새로 읽어도 정영상의 작품들은 타고난 순정의 논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유년 시절에 체화한 집안이나 이웃 농민의 빈궁한 현실에 대한 쓰라린 애절과 직시의 고통, 그리고 교편을 잡은 1980년대의 독재와 억압에 대한 저항 의지와 극복 의지를 담은 시 255편은 타고난 순정의 논밭에 자라난 곡식들이다. 순정성, 이것이 사람 정영상의 진면모"라고 평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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