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자격 시험’인데 영어만 터져 나가…대구 취준생도 어쩔 수 없었다.

  • 구경모(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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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2-18 21:10  |  발행일 2026-02-18
어학시험 응시 규모 3배·비용 64% 영어에 집중
고고익선 점수 관행 속 반복 응시 ‘취업 통행세’
대구 북구 엑스포에서 열린 채용박람회에 취업준비생들이 대거 몰리며 행사장이 붐비고 있다. 영남일보DB

대구 북구 엑스포에서 열린 채용박람회에 취업준비생들이 대거 몰리며 행사장이 붐비고 있다. 영남일보DB

취업 준비생들의 '영어 매몰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직무와 직접적 관련이 없어도 토익·토플 등 영어시험 점수가 이른바 '취업 통행세'로 자리잡은 탓이다. '고고익선(高高益善)'식 점수 관행까지 유지되면서 영어가 취업 시장 내 '스펙(SPEC) 가늠자'로 통용되는 모양새다. 기초 지자체(남구, 달서구, 달성군)들의 취업지원을 받는 대구 청년들도 예외일 수 없다. 이에 영남일보는 취업 현장에서 고착화된 '영어 스코어(SCORE)'의 현주소를 들여다봤다.


◆ 영어 시험에만 매몰, 사회적 '낭비' 우려


18일 한국산업인력공단(큐넷)에 확인 결과, 지난해 토익·토플 등 주요 어학 시험 전체 응시 인원은 280만명(연인원 추산)에 달한다. 같은 기간 산업기사 등 국가기술자격시험의 연간 전체 응시 인원(약 143만명)보다 2배 이상 많다. 통상적인 취업 준비 연령대인 20대 청년층만 놓고 보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지난해 어학 시험에 응시한 20대는 약 210만명(전체 74.2% 비중). 반면, 국가기술자격의 20대 응시 인원은 약 65만 명으로 3배 이상 차이가 났다.


어학 비용 지출 편중 현상도 뚜렷했다. 지난해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청년층 취업 준비 실태 조사 보고서'를 보면 취업 준비생의 월평균 취업 관련 지출액은 약 28만4천원이다. 이 중 64%가 영어 시험 응시료와 학원·교재 비용에 집중됐다. 영어 시험 쏠림 현상은 '고득점 인플레이션'에도 영향을 미쳤다. 토익 900점 이상 보유 비율만 41.3%에 달한다. 영어 점수가 취업에 있어 '있으면 유리한 스펙'이 아니라 '없으면 탈락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은 양상이다.


영어 시험에 쏟아붓는 시간도 상당하다.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취업준비생이 하루 평균 영어 공부에 사용하는 시간은 5.4시간이다. 전공 및 기타 자격증 공부 시간(3.1시간)을 크게 웃돌았다.


공기업 취업 준비생인 권지연(여·26·대구 서구)씨는 "직무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론 영어 점수를 먼저 챙길 수밖에 없다"며 "기업마다 직무 요건은 다르지만, 영어 점수는 거의 공통으로 요구한다. 점수가 기준에 못 미치면 서류에서 바로 탈락할 것 같아 불안감이 크다"고 했다. 이어 "사실 영어를 실무에서 얼마나 쓰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기본은 갖춘 지원자'로 보인다는 인식이 있다. 다른 지원자들도 다 준비하니까 나만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영어 시험 쏠림 현상은 선택이 아닌, 현 취업 시장 구조가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로 보고 있다. 채용 과정에서 영어 점수를 '1차 선별 기준'으로 활용하는 관행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 최근 발표된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ALIO) 공시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 공공기관의 78.2%가 여전히 영어 성적을 필수 요건이나 가산점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중앙대 이병훈 교수(사회학과)는 영남일보와의 통화에서 "영어 점수는 직무 수행 능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채용 현장에선 가장 간편한 필터로 관행화돼 있다"며 "그 결과 청년들은 응시에 반복적으로 매달리게 되고, 사회 구조적으로는 실제 전문성 축적과 무관한 비용을 계속 부담하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 북구 엑스포에서 열린 채용박람회에서 청년 구직자들이 채용 부스 앞에 모여 기업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영남일보DB

대구 북구 엑스포에서 열린 채용박람회에서 청년 구직자들이 채용 부스 앞에 모여 기업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영남일보DB

◆ 영어가 필수?…현장 딜레마 공존


취업 시장에서 어학 능력이 필수로 여겨지고 있지만 일선 기업들의 딜레마도 상당한 편이다. 영어 점수를 활용한 취업자 선별이 가장 손쉬운 방식이지만, 장기적으론 숙련 인력을 충분히 길러내지 못하는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취업 준비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직무 전문성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낮은 영어 점수 관리에 집중되면, 사회 전체적으로 인적 자원 축적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


대구 수성알파시티 내 한 IT기업 임원은 "영어 점수는 서류 단계에서 빨리 걸러내기엔 편리하지만, 실제 현장에 투입된 뒤 다시 직무 교육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채용 과정의 편의성이 현장의 인력 양성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채용 시장에선 한 기업만 기준을 바꾸기 어렵다. 영어 점수를 기본 조건으로 보는 관행이 오래 이어지다 보니, 이를 따르지 않으면 오히려 기준이 느슨하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는 부담이 있다"며 "지원자들 사이에서도 영어 점수가 '보여지는 스펙'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만큼 기업 역시 이를 완전히 배제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상황을 알면서도 기업과 지원자 모두 그 기준에 맞춰 움직이는 구조가 형성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영어 몰빵식 구도'에서 벗어나려면 정부 차원의 취업 가이드라인과 민간 기업 및 공공기관의 문제 개선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국고용정보원 이상호 연구위원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전체 고용 분위기가 어학 능력 비중을 줄이려는 방향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입사 지원서엔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스펙으로 여긴다. 회사가 원하는 전문 인재보단 '고루 잘 난 사람'을 뽑아놓고 보겠다는 풍토가 여전하다"며 "블라인드 면접에 앞서 서류 전형때 이미 영어 점수가 취업 성패를 좌우하는 편이다. 학업 성실성을 판가름하는 척도를 어학 능력에만 국한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용 판단은 직원을 뽑는 기업·기관들의 '자유 의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이는 직무와 무관한 어학 성적 요구를 지양할 강제 수단이 없다는 의미다"며 "민간 기업 등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병행돼야 한다. 정부 차원의 정책적 고민도 뒤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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