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대구대 회계학과 겸임교수
며칠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아래층에 사는 부부를 만났다. 아내는 먼저 올라 버튼을 누른 채 남편이 타기를 기다렸다. 목발을 짚은 남편은 자신의 느린 걸음을 재촉하듯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제가 좀 늦어요."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별생각 없이 답했다.
"괜찮아요. 조금 늦을 뿐이잖아요. 저희 아버지도 느리세요."
그들은 안도한 듯 웃으며 연거푸 고마워했다.
친정아버지도 전보다 느려졌다. 시골집 방에서 대문까지의 짧은 길도 이제는 아버지에게 긴 여정이다. 문턱을 넘고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짚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예전 같으면 몇 걸음이면 닿았을 거리다.
오늘도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 힘겨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짜증부터 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마당에 주저앉았다는 말이었다. 삼복더위에 태어난 강아지들의 재롱이 보고 싶어 앉은 것이 아니었다. 몇 걸음조차 마음대로 옮기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해서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아버지의 힘겨움이 보였다.
요즘 우리 가족의 시간은 아버지의 걸음에 맞춰져 있다. 외출 한 번, 병원 한 번에도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곁을 지키는 어머니도 지치고, 나도 마음의 여유를 잃을 때가 있다. 사랑하는 마음과 돌봄을 감당하는 현실은 때로 다르다. 걱정과 안쓰러움에 짜증이 섞이고, 돌아서면 미안해지는 일이 다반사다.
나도 아버지를 기다리지 못하곤 한다. 어머니가 재촉하면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아버지를 업고 차까지 모시기도 한다. 지난 주말에도 그랬다. 기다리기보다 업는 게 더 빠르다고만 생각했다. 아버지가 너무 느려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기다리는 법을 잊은 것일까.
세상은 갈수록 '빠름'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몸은 조금씩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걸음이 느려지고, 신발을 신거나 외출을 준비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늙는다는 것은 삶의 속도를 잃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10월2일은 노인의 날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밑바탕에는 한때 누구보다 부지런히 살아온 그들의 시간이 켜켜이 놓여 있다. 이제는 그들의 느린 걸음을 뒤에 남겨두기보다, 우리가 속도를 조금 늦추어 함께 걸었으면 한다.
노인을 존중한다는 건 어쩌면 앞서가던 내 걸음을 조금 늦춰 그들의 걸음에 맞추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엘리베이터 문을 몇 초 더 잡아주고, 느린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 일이다. 키오스크 앞에서 헤매는 사람을 조용히 기다려주는 일도 그렇다. 우리가 내어주는 그 몇 초가 곧 '존중의 시간'일 수 있다.
오늘도 깊은 주름과 군데군데 상처가 남은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며 장수지팡이를 건네고 몇 초 더 기다린다. 한때 그 손은 연필을 곱게 깎아 필통에 넣어주고, 새 교과서에 종이 달력으로 표지를 씌워주었다. 늦은 밤 막차에서 내려 어두운 시골길을 걸어오는 나를 기다려주기도 했다. 내가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도록 묵묵히 준비해준 든든한 손이었다.
그랬던 손은 이제 지팡이를 꼭 쥔 채 천천히 움직인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내 걸음에 맞춰준 시간이 훨씬 길었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걸음에 맞출 차례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다림이 필요한 때를 맞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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