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중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
지난해 가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APEC 2025 정상회의와 박물관 개관 80주년을 기념한 특별전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이 열렸다. 1921년 금관총에서 신라 금관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지 104년 만에 금관총·황남대총·천마총·서봉총·금령총·교동 여섯 고분에서 나온 금관 여섯 점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APEC을 계기로 신라 금관에 다시 한번 큰 관심이 쏠리면서, 그 찬란한 황금빛은 신라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런데 이 전시를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경주에 금관이 있다면, 대구에는 무엇이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 대구에는 금동관이 있다. 그것도 신라의 심장부 경주를 제외하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금동관이 출토된 곳이 바로 대구다.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사연부터 예사롭지 않다. 1923년 일제가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에 있던 천왕당 못을 메우기 위해 주변 구릉의 흙을 파내던 중이었다. 뜻밖에 고분 하나가 드러났고, 그 안에서 출(出)자 모양 세움장식을 갖춘 금동관 두 점이 나왔다. 지금의 달성고분군 37호분이다. 두 관은 둘레가 똑같이 18㎝여서 한 사람이 번갈아 썼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공사장 삽 끝에서 1천600여 년 전 잠들어 있던 대구의 지배자가 깨어난 셈이다.
이후 대구 곳곳에서 금동관은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 대명동 북구릉 1호분, 구암동 고분군, 문산리 유적, 신서동·노변동·가천동 일대 무덤에서도 금동관과 그 조각이 잇따라 확인됐다. 흥미롭게도 이 무덤들 중에서는 금동관과 함께 낫 모양의 겸형철기, 미늘쇠, 방울 달린 철탁이 묻혀 있었다. 대구와 이웃하는 경산지역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매장 양상이다.
대구 금동관 가운데 일부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무늬 새김 기법과 수리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신라의 금공품은 왕경 경주에서 만들어 지방으로 전해진 것으로 이해돼 왔지만, 이러한 특징은 대구에서도 금동관을 직접 만들거나 수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대구의 금동관은 경주의 금관과는 다르다. 구리 바탕에 금을 입힌 금동으로 만들었고, 일부는 크기가 작거나 사슴뿔 모양 장식이 생략되는 등 장식 구성이 한층 간략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화려함의 차이만을 뜻하지 않는다. 당시 신라 중앙과 지방 사이의 관계와 지역 수장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대구는 신라의 영향권 안에서도 낙동강과 금호강을 낀 요충지를 기반으로 지역적 힘과 개성을 지녔던 곳, 옛 이름 그대로 '달구벌'이었다.
경주의 금관이 천 년 왕국의 정점을 보여준다면, 대구의 금동관은 그 왕국을 이루었던 지방 세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려함의 크기로만 유물을 줄 세우면 정작 대구가 품은 이야기를 놓치고 만다. 국립대구박물관 고대문화실과 흙 속에는 아직 다 읽지 못한 달구벌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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