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없는 도시] 발포 중단 약속에도 탄압, 유족회 활동은 ‘북한 동조’ 혐의

  •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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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10-14 21:23  |  수정 2026-10-14 22:02  |  발행일 2026-10-14
이정우 前 청와대 정책실장·이광달 화백
부친으로부터 들은 10월항쟁 상황 증언
80주년 국회 토론회선 특별법 제정 촉구
1960년 대구 가창골 일대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던 이원식(왼쪽) 선생. 이광달 화백 제공

1960년 대구 가창골 일대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던 이원식(왼쪽) 선생. 이광달 화백 제공

1946년 대구 10월항쟁 당시 시민들이 경찰의 발포 중지를 요구하고 미군 측으로부터 재발 방지를 약속받았음에도 탄압이 계속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한국전쟁 전후로 희생된 민간인들을 기리고 진실을 밝히려던 유족회 활동마저 북한에 동조한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중단시키는 등 1948년 단독 정부 수립 이후에도 오랫동안 탄압됐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그의 부친 이종하 선생은 10월항쟁 목격자로 당시 대구사범대학 교수였다. 조현희 기자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그의 부친 이종하 선생은 10월항쟁 목격자로 당시 대구사범대학 교수였다. 조현희 기자

◆미군서 "발포 않겠다" 했지만 끝내 피신길 올라


'참여정부 참모' '하버드 출신 경제학자' '경북대 명예교수'.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대표하는 수식어들이다. 노무현 정부 초대 대통령 정책실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그는 고(故) 이종하(1913~2007) 선생의 막내아들이기도 하다. 지난 7일 대구 삼덕동에서 만난 이정우(76)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부친 이종하 선생의 삶을 이야기하며 아버지로부터 들은 1946년 10월의 기억을 꺼냈다. "광복을 맞고 대구사범대학 교수가 되셨는데, 그 무렵 10월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의 발포로 10월1일 노동자가 사망하자 다음 날 시민 대표로 미군정과 담판을 지으러 나가셨지요."


이종하 선생은 광복 직후 대구사범대학(경북대 사범대의 전신) 교수로 재직했다. 10월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대구사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항쟁 첫날인 1946년 10월1일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한 명이 숨지자 선생은 학생들에게 미군 측에 항의하러 나가자고 권유했다. 그러던 중 대구의대(경북대 의대의 전신)에서 출발한 학생·교원 150여명이 노동자의 시신을 앞세우고 대구사대로 행진해왔다. "학생들 반응이 처음엔 미온적이었는데, 시위대가 관에 시신을 담아 사대쪽으로 오는 모습을 보고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흥분해서 너도나도 몰려왔다고 들었어요."


1953년 대구 대봉동 자택에서의 이종하(두 번째 줄 맨 오른쪽) 선생과 가족들. 맨 앞줄 왼쪽이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이정우 실장 제공

1953년 대구 대봉동 자택에서의 이종하(두 번째 줄 맨 오른쪽) 선생과 가족들. 맨 앞줄 왼쪽이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이정우 실장 제공

이종하 선생과 학생들은 당시 경찰을 지휘하던 미군 대위를 만나기 위해 대구경찰서(현 대구중부경찰서 자리)로 향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이미 인파로 북적였다. 그때 경찰서 안에서 한 경찰관이 나왔는데, 이종하 선생의 초등학교 동기였던 신재식씨였다. 신재식은 경찰서 입구 계단 위에서 미군정과 친일 경찰을 비판하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고 이 전 실장은 전했다. "'내가 건국에 이바지하고자 경찰에 들어왔는데 들어오니까 전부 친일 경찰밖에 없고, 미군정은 친일 경찰만 비호하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더러워서 더 이상 경찰 안 할란다' 하면서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팽개쳤대요. 그러자 마당에 있는 군중들이 박수 치고 난리가 났었답니다."


이어 군중은 경찰의 발포를 중지시키기 위해 미군정과 협상할 대표 5명을 뽑았다. 이종하 교수가 수석대표를 맡고 정희준 대륜고 교사, 백가병 대구농대(경북대 농대의 전신) 교수 등이 참여했다. 대표단은 당시 경찰을 지휘하던 미군 대위를 만나러 올라갔다. "왜 경찰이 어제 발포해서 사람을 죽였냐고 따지니까 미군 측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했대요. 대표단 쪽에서 '(사실이) 맞다. 알아보라'면서 앞으로 절대 발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 했더니 미군이 알겠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담판이 끝난 뒤 결과를 발표하고 시민들도 해산하던 중 인근 만경관쪽에서 미군 탱크 한 대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드셨답니다. 그날 밤 사이에 여기저기서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알게 되셨대요. 잡혀가겠다는 불안감에 부산쪽으로 떠나 교사로 일하시다 서울로 또 거처를 옮기셨죠. 도망가셔서 그나마 처벌을 면했다고 합니다."


이광달 화백이 경산 자택에 있는 아버지 이원식 선생 흉상 앞에 섰다. 조현희기자

이광달 화백이 경산 자택에 있는 아버지 이원식 선생 흉상 앞에 섰다. 조현희기자

◆유족회 결성해 사형 선고…50년 만에 무죄 확정


이 전 실장은 자신이 "운이 좋았던 경우"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4일 경산 자택에서 만난 이광달(83) 화백은 아버지의 흉상을 보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광달 화백의 아버지 고(故) 이원식 선생(1913~1978)은 이종하 선생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10월항쟁으로 오랜 시간 고초를 겪은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서지학자이자 의사·수학자 등으로도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지만 10월항쟁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광복 후에도 군경을 피해 다녀야 했다. 생전 일곱 번이나 수감돼 생사를 오갔던 선생의 삶은 가족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아버지가 피신해 다니시느라 집에 안 계시니까 나는 여덟살에 고문을 당하고, 어머니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돼 한국전쟁 때 아버지 대신 가창골에 끌려갔어요. 이후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4·19혁명으로 새 시대가 열리자 이원식 선생은 아내를 비롯해 한국전쟁 전후로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1960년 6월 대구경북피학살자유족회를 조직했다. 국회에서 진상조사특별위원회까지 꾸려졌지만 유족회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며 유족회 간부들은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북한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혁명재판'에 넘겨졌다. 이원식 선생은 사형을 선고받아 1962년 수감됐다.


이원식 선생이 1964년 12월22일 작성한 옥중일기. 의대생들은 뚜껑이 없는 관 속에 시체를 넣고서 무장경찰대의 폭력적인 억압에 항고하는 데모를 했다 등 10월항쟁을 회상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광달 화백 제공

이원식 선생이 1964년 12월22일 작성한 옥중일기. "의대생들은 뚜껑이 없는 관 속에 시체를 넣고서 무장경찰대의 폭력적인 억압에 항고하는 데모를 했다" 등 10월항쟁을 회상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광달 화백 제공

이원식 선생의 옥중일기에는 10월항쟁을 회상하는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의대생들은 뚜껑이 없는 관 속에 시체를 넣고서 무장경찰대의 폭력적인 억압에 항고하는 데모를 했다. 이때 어젯밤부터 변함없이 대결 중에 있었던 대구시투쟁위원회 앞에서 또다시 발포가 발생했다. (중략) 분명한 것은 미군정과 한민당 과도정부에 대한 인민들의 불평과 불만의 증대가 '대구 10·1사건'을 폭발하게 한 계기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1964년 12월22일 '폭풍의 시월' 부분)


자식들은 1m가 넘는 두루마리 탄원서를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이원식 선생은 기적적으로 감형돼 1970년 출소했다. 다만 명예가 회복되기까지는 약 50년의 시간이 걸렸다. 2011년 대법원에서 열린 피학살자 유족모임 간부 3명의 재심에서 이원식 선생에 대한 무죄가 확정됐다. 앞서 1·2심 재판부도 "피학살자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고 위령제를 지낸 것은 북한과 관련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아버지는 병원을 운영하실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치료비를 일절 받지 않던 사람이셨습니다. 그런데도 '빨갱이'로 내몰렸고 온 가족이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고초를 겪었습니다. 여동생은 배가 고파서 운동장에서 쓰러지고, 누나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죠. 다행히 나에게는 미술이 있었고, 작업에 전념하며 그 고난의 세월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지길 소망합니다."


10월항쟁 80주년의 의미와 과제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지난 6일 국회에서 진행됐다. 조현희 기자

'10월항쟁 80주년의 의미와 과제'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지난 6일 국회에서 진행됐다. 조현희 기자

◆"전국적 범위로 조사하고 특별법 제정해야"


이처럼 피해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음에도 피해회복을 위한 움직임은 더딘 상황이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10월항쟁 진상규명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조사는 제한된 신청과 부족한 자료를 토대로 이뤄져 실제 희생 규모와 피해 실태를 온전히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다. 10월항쟁과 관련한 특별법 역시 아직 국회에 발의되지 않은 상황이다.


6일 국회에서 열린 '10월항쟁 80주년의 의미와 과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10월항쟁 특별법 제정, 전국적 범위의 진상조사, 피해회복 담당 기구 창설 등을 촉구했다. 관련 연구를 오랫동안 진행해온 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동학농민운동에 버금갈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난 항쟁이므로 전국적인 범위의 조사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며 "항쟁 이후부터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사건 관련자들의 행적과 활동, 이에 대한 군경의 대응 등을 직권조사해 항쟁을 더 거시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0월항쟁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법안에 담겨야 할 내용도 논의됐다. 김창록 경북대 명예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회복, 적절한 배상, 재발방지 및 국민통합이 포함돼야 한다"면서도 "후속 피해의 경우 10월항쟁과의 직접 관련성을 진실화해위원회가 자료에 따라 판단하게 해 다른 과거사 사건과의 중복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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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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