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기록이 없는 도시] 대구에 내려진 한반도 최초의 계엄…봉인된 역사 80년을 돌아보다

  •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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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10-01 21:26  |  수정 2026-10-01 22:22  |  발행일 2026-10-01
1946년 10월3일 미군정이 선포한 계엄 포고령 제3호.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집 안이나 그 인근에 머물러야 한다 누구도 대구 시내를 떠나거나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등의 명령이 떨어졌다. 권상구씨 제공

1946년 10월3일 미군정이 선포한 계엄 포고령 제3호.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집 안이나 그 인근에 머물러야 한다" "누구도 대구 시내를 떠나거나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등의 명령이 떨어졌다. 권상구씨 제공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집 안이나 그 인근에 머물러야 한다." "누구도 대구 시내를 떠나거나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도로차단선을 통과하려는 자는 무장부대에 의해 체포될 것이다." 1946년 대구 10월항쟁 당시 미군정이 내린 계엄포고령 내용이다. 미군정은 10월항쟁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10월2일을 기해 대구에 계엄을 선포한 뒤 대구 시내의 출입을 봉쇄했다. 한반도 최초의 계엄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그러나 오랜 시간 침묵이 이어지며 역사가 잊히고 항쟁을 둘러싼 왜곡과 날조가 반복되는 상황이다. 영남일보는 단독으로 입수한 10월항쟁 당시 미군정 자료와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근현대사 관련 학술·문헌자료 153건, 학자들의 고견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심도 있게 살펴봤다. 사건의 주요 쟁점을 중심으로 심층 분석했다.


사건의 명칭은 관점에 따라 '10월항쟁' '10·1사건' '영남소요' '10월폭동' 등으로 다양하다. 다만 최근 관련 연구에서 '10월항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례가 다수라는 점, 대구시의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에서 '10월항쟁'을 공식 명칭으로 표기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본 보도에서는 '10월항쟁'이라는 명칭을 따랐다.


1946년 10월2일 대구 10월항쟁 당시 경찰들이 대구 도심에서 총을 들고 걸어다니고 있다. 미군정 문서 Troop Information & Education 내 사진·존슨 대위 촬영 추정

1946년 10월2일 대구 10월항쟁 당시 경찰들이 대구 도심에서 총을 들고 걸어다니고 있다. 미군정 문서 'Troop Information & Education' 내 사진·존슨 대위 촬영 추정

◆자주국 건설 좌절·식량난·친일경찰…대규모 봉기


'10월항쟁'은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해 1946년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역 73개 지역에서 진행된 민중봉기다. 광복 직후 당시 고조된 건국운동의 열기는 미군정이 들어서며 난관에 부딪혔다. 미군정은 남한에 소련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제강점기 진보세력을 탄압한 경험이 있는 친일 경찰을 국립경찰에 대거 기용했다.


여기에 식량난이 호전되지 않자 1946년 2월 '미곡수집령'을 발표하고 쌀 강제 수집과 제한 배급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1946년 5~6월 콜레라와 수해까지 발생해 아사자는 더욱 속출했다. 영남일보 1946년 7월2일 자 2면에 당시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지면에는 '군정당국은 사태를 어떻게 보나 기아시민 관청에 쇄도…' '배고파 못살겠소 눈물의 호소도 가지가지' 등을 제목으로 한 기사들이 게재됐다.


이 같은 불만과 친일 경찰에 대한 분노, 자주국가 건설에 대한 좌절이 복합적으로 얽혀 9월 총파업이 시작되고, 9월 총파업은 10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김일수 경운대 교수(교양교육학과)는 "쌀이 필요한 문제만으로 벌어진 일이었다면 '항쟁'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큰 구도 속에서 1946년 10월이라는 시점의 역사적 의미를 봐야 한다"고 했다.


1946년 10월1일 대구시민들이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기아행진을 하고 있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1946년 10월1일 대구시민들이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기아행진을 하고 있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노동자 사망에 시민들 분개…미군정은 계엄령 선포


항쟁의 시발점인 대구는 열기가 거셌다. 1946년 9월 기준 대구의 인구는 26만9천명이었다. 미 24군단 사령부에서 써낸 '한국 대구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에 관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0월1일 이른 오후에만 1천명에서 1천500명으로 추산되는 군중이 철도역(대구역) 근처 노조본부에 집결했다. 오후 5시쯤 군중의 수는 3천~4천명으로 증가했다. 같은 날 대구부청(현 대구시의회)·경북도청 앞에서도 여성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식량시위가 열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동시에 벌어진 시위의 규모는 점차 커졌고 경찰은 총을 발포했다. 이 발포로 노동자 김용태가 이날 사망했다.


1946년 10월2일 오후 5시 미군정이 대구에 선포한 계엄 포고령 제1호. 권상구씨 제공

1946년 10월2일 오후 5시 미군정이 대구에 선포한 계엄 포고령 제1호. 권상구씨 제공

민간인 사망자가 나오며 다음 날인 2일 오전에는 청년·학생 시위가 대구경찰서 앞에서, 부녀동맹 주도의 시위가 대구부청 앞에서, 노동자 시위가 대구역 광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날 오전 9시쯤 대구의대(경북대 의대의 전신) 학생과 교원 150여명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김용태의 시신을 앞세우고 대구의대에서 출발해 대구사대(경북대 사범대의 전신)로 행진, 시내 중심가를 거쳐 오전 10시쯤 대구경찰서 앞에 도착했다.


대구사범대학 교수였던 고(故) 이종하씨는 생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 구술채록에서 다음과 같이 그날 상황을 증언했다. "경찰 발포로 노동자가 죽고 있다고, 그걸 중지시키기 위해 대구경찰서에 가서 미군 책임자에게 항의해야 되지 않겠나 어쩌냐 카고 있는데. 의대 쪽에서 당가를 들고 왔는 기라. 그걸 보자 사살된 노동자가 바로 저기 막 실려 온다, 그 정도로 굉장히 그렇게 (긴박한 느낌을) 느꼈어요."


시위가 거세지자 경찰은 일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고 대화에 나섰다. 하지만 상황은 진정되지 않았다. 미군정은 오후 5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계엄이었다.


◆한반도 최초의 계엄…"집에 머물라, 도로차단선 통과 시 체포"


1946년 10월3일 미군정이 선포한 계엄 포고령 제2호. 민간인이 소지하고 있는 모든 무기는 즉시 시 경찰에 반납할 것 구금하고 있는 모든 가족과 경찰관을 즉시 석방할 것 등의 내용이 담겼다. 권상구씨 제공

1946년 10월3일 미군정이 선포한 계엄 포고령 제2호. "민간인이 소지하고 있는 모든 무기는 즉시 시 경찰에 반납할 것" "구금하고 있는 모든 가족과 경찰관을 즉시 석방할 것" 등의 내용이 담겼다. 권상구씨 제공

미군 방첩대의 'Civil Disturbances, 1946 August-October(1946년 8~10월 민간 소요)' 문서철 중 영남일보가 시간과공간연구소 권상구 상임이사를 통해 단독 입수한 계엄 포고령 원문에 따르면, '포고 제1호'에 '대구에 계엄을 선포한다. 경찰은 법과 질서를 유지할 것이며, 필요한 경우 무력이 사용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구체적으로는 ①경찰의 지시에 복종할 것 ②10명을 초과하는 집회 및 군중의 집결 금지 ③오후 7시부터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 ④승객만을 운송하는 차량 및 식량 배급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 차량은 대구 시내 통행 금지, 위반 차량은 몰수 등의 내용이 담겼다.


대구에서의 항쟁은 2일 저녁 계엄령 선포 몇 시간 만에 진압됐다. 그러나 미군정은 다음 날인 3일 다시 포고 제2·3호를 발령했다. '포고 제2호'에는 ①민간인이 소지하고 있는 모든 무기는 즉시 시경에 반납할 것 ②구금하고 있는 (경찰·친일 지주 등의) 모든 가족과 경찰관을 즉시 석방할 것 ③주택, 재산, 가구, 의류 등에 대한 파괴 행위를 중지할 것 ④주택의 약탈 및 강탈 금지 ⑤위반 행위는 무력으로 제지될 것 등의 경고가 적혔다.


같은 날 선포된 '포고 3호령'은 시민의 이동을 더욱 제한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집 안이나 그 인근에 머물러야 한다' '누구도 대구 시내를 떠나거나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 담겼으며, 도로차단선을 통과하려는 자는 무장부대가 체포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됐다. 대구에 내려진 계엄령은 10월22일이 돼서야 해제됐다.


권상구 상임이사는 "당시 미군정에서 작성한 계엄 포고령 원문이 미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수집돼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었고 이를 확인했지만 널리 공유되지 않았다"며 "10월항쟁 당시 미군정의 대응과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당 자료의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항쟁 주체 놓고 의견 분분…학계선 '일반 민중' 주장


미국 하지 장군의 1946년 12월5일 특별 보도자료. 항쟁 직후 좌우 합작위원회와 미군 측 대표로 구성된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에서는 항쟁이 일어난 첫 번째 원인으로 경찰에 대한 적대감, 군정 내의 친일 협력자들의 존재, 정부 내 통역관의 영향 등을 들었다. 주한미군 군정청 공보부 자료

미국 하지 장군의 1946년 12월5일 특별 보도자료. 항쟁 직후 좌우 합작위원회와 미군 측 대표로 구성된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에서는 항쟁이 일어난 첫 번째 원인으로 "경찰에 대한 적대감, 군정 내의 친일 협력자들의 존재, 정부 내 통역관의 영향" 등을 들었다. 주한미군 군정청 공보부 자료

미군정은 당시 항쟁을 '폭동' '소요'라 규정하며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선동되고 지휘됐다"고 봤다. 10월항쟁을 '폭동'으로 보는 시각에서도 좌익세력의 선동 또는 '박헌영(조선공산당 수장)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주장해왔다. 그러나 학계 및 최근 연구에서는 좌익세력의 개입을 인정하면서도 민중의 자발적 참여가 더 중심이었다고 본다. 항쟁을 '좌익 대 우익'보다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이에 따르면 시위가 발생할 요인은 산적해 있었다. 또 광복 직후 공산당을 비롯한 대구의 좌익세력은 미군정에 협조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갈등이 있긴 했으나 항일운동을 함께했다는 공감대 속에서 우익세력과 지역 문제를 협의하고 몇 차례 합작을 실현하기도 했다. 항쟁 과정에서 경찰의 사망이 있었지만 폭력은 친일분자에 집중됐다. 일제강점기 친일 여부와 그 정도에 따라 폭력 대상이 정해졌다. 항쟁 직후 좌우합작위원회와 미군 측 대표로 구성된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에서도 항쟁이 일어난 첫 번째 원인으로 "경찰에 대한 적대감, 군정 내의 친일 협력자들의 존재, 정부 내 통역관의 영향, 일부 조선인 관리들의 부정행위" 등 인사 문제를 들었다.


중앙당에서 어떤 지시를 내린다고 해서 대중이 바로 움직일 정도로 광복 직후의 정치 조직 역시 치밀하지 않았다. 김학노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누가 우리인가? 10월항쟁, 우리 형성의 헤게모니 투쟁'(2022)에서 "항쟁이 대구 인근 경북 지역으로 확산한 이후 전국적으로 동시에 일어나지 않고 산발적으로 전개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전국 차원에서 항쟁을 지도하거나 통제할 지도부가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1기 진실화해위 조사관이자 책 '10월항쟁'의 저자 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당시 박헌영은 해주(북한 황해도)에 있었다. 대구에 조선공산당 시당이 있었기에 좌익세력이 참여했을지는 몰라도 그 많은 사람이 해주에 있던 박헌영의 지령에 의해 시위에 참가했다고 보기 힘들다"고 꼬집었다. 김경남 경북대 교수(사학과)도 "조직적으로 움직인 운동 세력이 있었지만 식량정책 실패 등에 분노한 비조직 대중이 합세하면서 항쟁의 규모가 커졌다. 이어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해 많은 사람이 분개한 것"이라고 했다.


1일 대구 달성군 가창면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일대에서 열린 10월항쟁 80주년 추념식. 조현희기자

1일 대구 달성군 가창면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일대에서 열린 10월항쟁 80주년 추념식. 조현희기자

◆연좌제·좌익 낙인찍기로 침묵…'봉인된 역사' 풀어야


항쟁 직후 대구부 후생과에서 발표한 1946년 11월13일 기준 대구·달성지역 피살자 명단에 따르면 민간인 피살자는 23명, 경찰·관리 피살자는 11명이다. 항쟁이 진압된 뒤에는 대구경북에서 8천여명이 시위 가담 혐의로 검거돼 재판에 부쳐졌다. 이후에도 관련자들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거나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돼 한국전쟁 시기까지 군경 등에 의해 계속 학살됐다. 대구 가창골과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집단 사살되기도 했다.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미군정기 민간인 희생사건(군경에 의한 희생사건)과 관련해 "희생자 수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은 지역은 1946년 대구 10월사건이 영향을 미친 대구・영덕 등 경북지역이었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기 진실화해위가 확인·추정한 미군정기 희생자 합계는 92명이다. 이 중 69명이 경북지역(대구 포함)이었다. 2기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와 한국전쟁 전후로 희생된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10월항쟁과 관련한 희생자는 대구에서만 수백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항쟁 이후 수많은 민간인이 사망하며 지역사회에는 집단 트라우마가 형성됐다. 폭력은 유족에게도 대물림됐다. 연좌제와 반공을 내세운 군사정권이 1980년대까지 이어지고, 좌익 낙인찍기 문화로 10월항쟁은 오랫동안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 '봉인된 역사'가 됐다. 김상숙 교수는 "대구는 군부독재정권 시기 인혁당사건 등 타 지역보다 사회운동이 강하게 탄압받으며 '진보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고 진실을 공론화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더욱 형성됐다. 그 과정에서 10월항쟁도 묻혀버린 것"이라고 했다.


10월항쟁이 많은 시민에게 알려지기 위해 지역사회의 분위기도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진실화해위 위원을 지낸 홍순권 동아대 명예교수(사학과)는 "진실화해위 초기 진실규명 접수를 받을 때 '괜히 신청했다가 나중에 또 정권이 바뀌면 사회적으로 무슨 봉변을 당할까'라는 두려움에 신청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김경남 교수는 "10월항쟁을 '니편, 내편' 가르기로만 보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80주년인데도 아직 규명과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김동춘 성공회대 명예교수(사회학과)도 "대구경북의 지역 분위기상 10월항쟁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낮기 때문에 이제라도 지자체와 국가가 화해 및 기념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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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문화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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