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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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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날] 6인조 어쿠스틱 밴드 '음악여행'…대구 통기타 무대 이끈 밴드 리더 오영훈, 멤버 5명과 포크문화 저변 확대 나서다
'참으로 오랜 시간 나만의 진솔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너무 연로하신 어머님 생각과 사랑의 아픔으로 아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연인들을 생각하며 불러봅니다.' 지난해 10월 생애 첫 앨범(EP)을 출시한 포크뮤지션 오영훈(64). 그는 프롤로그를 그렇게 적었다. 어머니의 참빗과 서릿발, 그 두 곡의 노랫말은 자신이, 작곡은 라이브카페 '쎄시봉'의 대표 원찬희가 맡았다. '생전에 면사포 한번 못 써보시고…중략…오늘은 참빗 하나 사서 품속에 넣었네', 어머니의 참빗은 오영훈만의 사모곡이랄 수 있다. 전체 정조는 애잔하다. 80년대 초 국내 록 문화에 한 획을 그은 록밴드 사랑과 평화의 '어머니의 자장가'가 연상된다.밴드 리더인 오영훈. 그는 웬만한 추억의 팝송은 다 커버한다. 밤무대 업계에서는 나름 '레전드급'이란 평가를 받는다. 절정기엔 히트 친 팝송과 가요, 2천여 곡을 레퍼토리로 거느리고 있었다. 덕분에 13년간 실력파들만 오를 수 있다는 수성관광호텔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롱런한다.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그는 통기타를 들고 대구로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처음에는 동성로 라이브클럽 '꼬방꼬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가수 이상래와 손을 잡고 '대구통기타동우회'를 결성하는 데 일조한다. 2004년부터 달서구 본리동 네거리에서 7080밴드 '정다운 친구들'의 리더싱어로 활동을 한다. 나이트클럽 대림관에 온 추억의 밴드 '딕훼밀리' 무대에도 섰다.지방의 무명 통기타 가수,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서울을 거점으로 나름 유명세와 인지도가 없으면 기반을 다질 수가 없다. 젊은 시절에는 깡으로 무대를 지킬 수도 있지만 생계에 지면 다들 이 바닥을 떠난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음악이 뭔지도 모른 채 손님이 좋아하는 히트곡만 앵무새처럼 짖어댈 수밖에 없는 나날들, 그는 그런 생활에 점차 지쳐만 갔다.일단 심기일전을 하기 위해 2011년 효목동에서 통기타학원을 오픈한다. 9년 전 만촌동 현재 자리로 이전을 한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음반으로 만들자고 결심한다. 그래야만 죽을 때 덜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런 맘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배가 맞을 것 같은 멤버들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젊은 시절 나이트클럽 1진 무대를 주름잡았던 원찬희. 그가 기타학원을 차릴 무렵 중동교 근처에서 라이브클럽 '쎄시봉'을 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뮤지션을 더욱 지치게 했다. 별다른 공연도 없으니 오직 새로운 노래 만드는 데 집중할 수가 있었다. 원찬희도 20여 년 전 10여 곡을 작곡해 두었다. 그 공력을 오영훈의 노랫말과 버무려 새 음반으로 숙성시켰다. 원찬희는 기타에 최적화된 뮤지션. 그룹사운드 '에그니스'의 리더 기타리스트, 이후 옛 중앙로 한일호텔 전속 윤창수 밴드 등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틈틈이 소년소녀가장 돕기 거리공연 등을 하면서 판에 박힌 듯한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한을 삭여냈다.이밖에 라이브클럽 쎄시봉에서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치는 신정애는 유치원 교사 출신. 드러머 최종희는 한때 함중하 밴드에서 드럼을 쳤고 현재는 달성문화재단 드럼과 기타 강사. 베이시스트 김광우는 서울로 올라가서 '청개구리밴드'에 간여한 적이 있다. 부동산업을 하면서 클래식 기타와 키보드 연주에 열중인 서찬우도 의기투합했다.음악여행은 지난해 5월 결성된다. 첫 음반의 경우 작사·작곡·편곡·녹음까지 자체 힘으로 해결했다. 향후 자작곡 정기공연을 통해 지역 포크문화 저변 확대에 나설 예정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6인조 어쿠스틱 밴드 '음악여행'. 오른쪽 둘째가 리더 오영훈.오영훈 1집 앨범.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갱년기 문화운동가 정경아, 여성 갱년기 지침서 '나이 먹는 즐거움'…유쾌발랄 노년기 삶 전수
일흔을 눈앞에 둔 난 정경아(필명은 박어진). 매 순간이 파티인 '아짐씨'였다가 일순 '명랑할멈', 계절의 변화에 빛의 속도로 반응하며 사는 '감동녀'. 유쾌 발랄~ 룰루랄라…, 그렇게 그럭저럭 '빈둥빈둥 잘 먹순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 지면을 통해 노년사용법, 남편사용법 등을 전수해 주고 있다. 지인들에게 '얘들아, 비굴하게 젊어 보이려 애쓰지 말자. 매력 있는 할매 클럽, 뭐 이런 거 하나 만들어 보는 게 어때. 이거 숙제야!'라고 엄포를 놓기도 한다.◆춤추는 할매올해 그의 숙제가 있다. 그건 '김수악류 진주교방 굿거리춤'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한국무용 배우기'라는 유튜브 채널을 벤치마킹하고 있다.그녀 인생의 팔 할은 웃음. 미소와 한 몸으로 움직인다. 1초가 멀다 하고 깔깔댄다. 순도 99%짜리 파안대소. 그건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냥 천성이다. 툭하면 웃어댔던 중학교 시절, 담임 선생은 그런 날 보고 '뻥쇠'라 했다. '맹랑하고 유쾌하고 순박한 놈'이란 별명이었다. 이제 어지간히 평범해졌다. 되고 싶은 인물상도 딱히 없다. 그냥 정경아로 살다 가고 싶어 한다. '여성갱년기지침서'랄 수 있는, 그의 개똥철학이 집대성된 한 권의 책이 있다. 2007년 한겨레출판사에서 출간한 박어진의 좌충우돌 갱년기 보고서인 '나이 먹는 즐거움'이란 책이다. 그게 화제가 됐다. 그 인연으로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 연재, 최근에는 조금 입소문이 난 처지였다. 현재 '브런치(Brunch)'란 온라인 글쓰기 공간을 통해 '건달할미 연대기'란 닉네임으로 은퇴 후 삶을 주제로 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올리고 있다. 쉽고 깔끔하고 그러면서도 짠한 메시지가 담긴 그의 글솜씨는 수준급. 고건 전 서울시장도 그의 글에 반해 자서전 집필을 위해 러브콜을 할 정도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한국일보 산하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11년 활동했다. 대구로 내려와 미국공보원(USIS)에서 8년 정도 근무했다. 그러다가 1997년 7월 대구 USIS가 문을 닫을 때 상경,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선임전문위원으로 근무를 했다. 카이스트 공학박사 출신인 남편(송재원)을 만나 84년 결혼을 했다. 남편은 경북대 IT대학 전자공학부 교수로 있었다. 그래서 4년간 주말부부를 감내했다. 생활명상클럽인 '새세상여성연합대표' 등으로도 활동했지만 지금은 '이름 없는 정경아'로 사는 게 더 재밌다.◆짠한 '웬쑤' & 남편남편은 종일 한글의 자모 체계를 연구한다. 뜬금없이 한글연구라니? 이유가 있었다. 한글의 점자화가 그의 화두 중 하나다. 현재 쓰이는 점자는 배우기 어렵다는 게 그의 소견. 앞으로 한글 공용화를 추진할 세계인에게 쉽게 익혀 쓸 수 있는 점자를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갖고 있다. 스마트폰 한글 자음과 모음도 현행보다 더 편리한 배열 방식을 고안해 냈다고 주장한다. 연구 덕분에 속기사용 자판 시스템을 참고로 해서 세상에서 가장 편리한 신개념 노트북 한글자판기 모델 기술에 대한 특허를 출원 중이다. 자기가 개발한 자판이 나오면 글쓰기 속도가 엄청 빨라질 거란다. 그래서 그런지 대구 남편 집은 사계절 난장판이다. 망원경 20대를 포함,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자재와 공구, 목재 더미들은 서울 아파트의 수용범위를 넘어섰다. 책 더미를 제외한 건데도 말이다. 남편은 대구 사과의 마지막 자존심인 동구 평광동에 새집을 지어 13년째 살고 있다. 그전에는 산 주인이 되고 싶어 청도에 있는 산을 구입하기도 했다. ◆슬기로운 노년그의 가족은 참 이상하다. 각자 알아서 너무나 잘 논다. 그는 서울에서, 남편은 대구에서 논다. 딸은 서울, 아들은 평택에서 잘 굴러간다. 한 달의 반은 대구로 내려가 남편과 함께 논다. 딸과 아들의 삶에 대해 그가 지켜 온 최소한의 개입 원칙, 이젠 남편에게도 확대 적용 중이다. 남편이 그를 바꾸려 하지 않는 것처럼 그 또한 남편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둘은 만나면 좋은 친구로 '명랑한 별거 시대'를 살아간다. 그는 지금 결혼한 독신주의자 같단다. 그의 노년 사용법의 요체는 '완주(完走)'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당분간 계속될 삶의 여정을 끝까지 가보는 거다. 그러려면 'Travel light', 봇짐은 가볍게 꾸리는 게 맞다. 물론 제아무리 호탕하게 출발한들 어느 시점부터 고독과 질병의 연대기로 바뀔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갈수록 예측이 불가능한 게 노년이니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으로 최대한 명랑하게 그의 '으랏차차 노년탐사'는 쭉 계속될 것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모처럼 남편이 있는 동구 평광동 집에 온 아내가 룰루랄라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다. 만면에 가득한 파안대소, 갱년기 문화 운동가를 자청한 그녀의 일상은 탱고처럼 강렬하면서도 잠자리 날개처럼 홀가분하다.2007년 출간해 호평받은 책, '나이 먹는 즐거움'을 보여주고 있다.출간한 책 내용 중 아들의 설거지 부분.햇살 좋은 평광동 집 뒤란 장독대에서 커피 잡담을 나누는 부부.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작가 김영진(2) 서울 국립현대미술관·뉴욕 구겐하임미술관서 잇단 러브콜…'50년만의 봄날'
나는 '대구의 첫 약국'으로 불리는 동성로 대동약국 집 아들이었다. 동아백화점에서 시청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다. 내 맘은 늘 서울대 미대에 있었다. 입학시험을 앞둔 전날 밤 무슨 호기였던지 지인과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다음날 일어나 달려가 보니 시험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낙방, 분통이 터졌고 오기가 발동했다. 나는 대구로 내려오지 않았다. 서울대 미대생인 양 그 교정 언저리에 닻을 내리고 당시 예술쟁이들과 세월을 낚았다. 그 공간은 다름 아닌 내가 인프라를 구축했던 '빌라다르'다. 서울대가 관악산 캠퍼스로 옮겨가기 전 연건동에 있었던 교내 카페였다. 나는 거기 '문화깡패'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대 '한 예술, 한 문화' 한다는 친구들을 서로 연결해주었다. '아침이슬'을 작곡한 후배 김민기도 그 공간의 혜택을 받았다. 나는 500만원을 빌려 그 공간을 오픈했다. 그리고 3년6개월간 별별 실험적인 문화 운동을 다 벌여본다. 그 공간을 축으로 훗날 한국 포크 뮤직사에 한 획을 긋는 굵직한 뮤지션이 탄생한다. 김민기, 이현경과 박영애가 결성했던 여성 포크 듀오 현경과 영애, 68년 조소과에 입학한 이정선 등이다.그리고 대구 출신인 정강자의 퍼포먼스와도 맞물려 돌아간다. 그녀는 1968년 5월30일 서울 종로구 종로1가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정찬승·강국진과 함께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해프닝을 선보이며 이름을 알렸다. 이 작품은 당시 미술계와 사회 전반에 걸친 부조리에서 벗어나 여성해방을 추구한 행위예술로 평가받았다. 대구의 첫 약국 '대동약국' 집 아들 서울서 문화 인프라 '빌라다르' 구축 '아침이슬' 작곡한 김민기도 어울려 40년전 만든 풍선간판 세계로 퍼져 도무지 팔릴수 없는 작품 쏟아 냈지만 언론지상에 내 이름도 보이기 시작 올해는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도 5월 대구미술관서 평생의 작품 전시◆앵포르멜 & 앙데팡당이제 고인이 된 부산 출신의 갑장인 이동엽(1946~2013). 홍대 미대 출신인 그는 한국 첫 단색화 전시로 일컬어지는 75년 일본 동경화랑의 '한국 다섯 명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 전'에 박서보, 허황, 서승원, 권영우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동엽은 7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서울 앙데팡당전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나는 2회부터 몇 년 그 전시회의 '무서운 아이'로 불린다. '설치미술'이란 개념도 없을 때 난 난동을 부렸다. 진흙과 석고 더미에 내 몸을 던져 분절된 신체의 역설적 미학을 보여주었다. 모래 속에 몸을 파묻고 석고에 내 얼굴을 찍고 오욕칠정의 표정을 위해 머리카락도 밀어버렸다. 해프닝과 퍼포먼스, 그리고 비디오아트, 개념미술 등을 다 동원한다. 이미 관습과 통념에 의해 익숙해진 회화를 낯설고 생경하게 해체시켜 나갔다. 국내는 여전히 동양화가 주류였다. 그 진영에서 날 어떻게 봤겠는가. '미술계의 빨갱이'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훗날 한국 신개념 간판의 효시가 되는 '풍선간판'도 그 무렵 대구에서 태어난다. 40년 전 화실에 있던 수레용 선풍기를 분해하여 스테인리스 밥그릇 위에 올려놓고 나일론 흰색 천을 틀로 박아 만든 작업이다. 20년 후 내 자료집이 나간 후 길가에서 간판으로 세워지고 있었다. 업자들이 상업적으로 벤치마킹한 모양이다. 그 아이디어는 지금 전 세계를 떠도는 디자인 물로 확산됐다. 바르셀로나 축구장 응원용 풍선에서 남미의 골목까지 퍼져나갔다. 엄밀히 말해 그게 저작권법에 위배되지만 나는 그 어떤 로열티도 못 받았다. 나의 두 번째 절창은 '대구현대미술제'였다. 잠시 대구가 한국 현대미술의 요람이 되는 순간이었다. 5회 동안 박서보, 이우환, 이건용 등도 참여했지만 전 대회에 모두 참가한 주역은 5명. 나를 포함 이강소, 박현기, 최병소, 황현욱. 이강소가 그 미술제를 생각해 냈다. 이후 나만 빼고 모두 한 문파를 개척한다. ◆작업실의 대숲바람내가 작업에 열중할수록 나는 더 풍화되어간다. 내 작업실도 그 연장선에 있다. 서울의 삶을 정리하고 30년 전 경주로 내려오기 전 나는 심신이 바닥이었다. 1년 정도 지리산 언저리를 뜬구름처럼 떠돌며 요양을 했다. 지금은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의 남산 동쪽 끝자락, 통일전의 지기를 품고 있는 한 야산 대숲 속에 내 작업실이 숨어 있다. 입구가 너무 으스스하다. 무슨 철물상, 아니 철물점 같은 분위기다. 한창 작업을 하다 보면 내가 무슨 음지식물이 된 것 같다. 겨울에는 난방도 되지 않는, 너무나 냉기 가득한 거기에 서면 상대적으로 내 전의(戰意)는 더욱 번쩍거린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 가지가 자그락 자그락 창문을 긁는다. 녹슨 철문을 여는 소리가 스며 나온다. 내게 그건 아방가르드 음악이다.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았다. 매달리지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냥 밥을 먹듯 작업만 살아나갔다. 진정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세월이 먼저 알아보는 것 아닌가. 기성 미술계는 허교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그 상업성을 나는 저주했다. 나는 갈 데까지 가보려 했다. 내 실험의 끝, 그게 내 화두였다. 희한하다. 가끔 봄의 새싹처럼 도반이 찾아온다. 도자기의 물성을 찾아 경주로 잠시 내려온 '오리화가' 이강소, 작고한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과 친한 대구 실내건축의 신기원이 된 박재봉과 석굴암 동굴의 어둠을 더듬기도 했다. 신문지를 연필로 다 지워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 최병소, 국내 비디오아트의 신기원인 박현기와 죽이 맞아 반월당 행복식당에서 통음했다. 이제 그 모든 게 추억의 장으로 넘어갔다.지난 50년간, 도무지 팔리지 않는, 아니 팔릴 수가 없는, 3천여 점의 작품을 쏟아냈다. 그리고 몇 년 전 내 작품 도록 구실을 하는 예술론을 책으로 묶었다. 내 예술의 모든 방향을 간추렸고 그 지향점을 언급했다. ◆김영진의 봄날근자에 내 이름이 언론지상에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내 작품을 사 가지 않나, 그 작품을 뉴욕 구겐하임 측이 러브콜했다. 그 흐름에 있는 게 올해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주최하는 '한국 실험미술 1960~1970'전이다. 이중섭, 박수근과 더불어 한국적 정서를 구현한 대표 작가로 꼽히는 장욱진의 회고전과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구림(1/24초의 의미)의 개인전, 그리고 강국진,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최병소 등 한국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26명의 작품과 자료 등 100여 점이 소개된다. 5∼7월 서울 전시에 이어 9월 구겐하임미술관, 내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 전시가 예정돼 있다. 그리고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에도 참가할 계획이다. 오는 5월에는 대구미술관 2층 전관에서 평생의 작품을 전시하게 된다. 나름 고생을 했고 나름 보람을 느낀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경주 남산 작업장 초입에 앉은 김영진. 작가라기보다 잡부일 것 같다. 염색공, 용접공, 미장공, 타일공, 페인터, DJ, 전기공, 운전사, 배달꾼, 디자이너, 농부, 도예가, 사진가, 그러다가 누구의 선생이 되기도 한다.젊은 시절의 김영진 모습과 포스터 및 각종 사진자료.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작가 김영진의 생각
예술은 바로 실재계라는 사라진 진리의 차원을 이미지를 통해 구현하려는 존재론적인 행위다. 작품은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생각(사유)하게끔 해야 한다. 미술은 베끼는 것도 아니지만 배우는 것도 아니다. 1세대 선배님들은 거의 선생의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자유가 사라진다. 전시란 뭘까? 자랑이 아니다. 자기 필연의 고백이 없다면 왜 이 짓을 자꾸 할 수밖에 없는가. 일상과 우주의 지혜를 연마하는 작업(고행)을 하여 구원의 길로 인도된다. 작업은 또 뭔가? 예술은 객관성 속에 주관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머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느낌을 통해서 이어간다. 자신만의 가치체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 아닌가. 그래서 작업은 사유에서 나온다. 그것도 깊게 잠재된 사유. 그 숙성된 생각이 문득 깨달음처럼 와도 그놈한테 먹혀선 안 된다. 다시 그걸 수정·발전·포기하면서 시대성과 필연성과 연계해 봐야 한다. 작가는 꿈을 꾸는 인간이다. 꿈과 이상이 있는 이상 늙지 않는다. 세월은 얼굴에 주름을 주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있을 때 영혼은 주름지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는 늙음은 젊음의 상실이 아닌 젊음의 완성이다. 글로써 생각을 풀어 보고 그림으로 생각을 막아본다. 작품은 나를 위한 거고 상품은 남을 위한 것이다. 작품은 자기만족(도취)이고 상품은 타인만족(돈)이다. 작품은 애물단지이고 상품은 명예를 좇는다. 작품은 거칠게 상품은 곱게 만들어진다. 작품은 적당히 못나야 하지만 상품은 예쁘장해진다. 작품이 무심이라면 상품은 성심의 범주에서 멈춘다. 작품은 미완성이지만 상품은 완제품으로 추락한다. 작품은 필연의 산물, 하지만 상품은 기획의 산물 아닌가.나는 평생 누구에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늘 지금 여기에 있다. 최병소 선배한테 그렇게 말했다. '내가 죽어 없어지고 얼마 후 부음 소식을 들으시더라도 섭섭해하지 마시라'고. '자연에 무덤이라는 혹을 절대 남기지 않겠다'고. '내 유골이 빨리 지워지는 모든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고. '남은 작품 다 태워버리고 가고 싶다'고. 그래서 '세상이 더욱 투명해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작가 김영진(1) 경주 남산자락서 3천여 점의 실험예술에 올인
충분히, 아니 능히, 그러면서도 굳이, 나는 전위(前衛·Avant-garde)이고 실험으로 살다 가려 한다. 지금 내 심신은 중력을 벗어난 인터스텔라(Interstellar·星間). 나는 거기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처럼 예술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겨냥하지 않고 모든 걸 겨누는 혁명적 열정이어야겠지. 타인을 무시하면서도 자신을 철저하게 넘어서는 인생. 그래서 나는 늘 잘하는 게 아니라 새로워져야 한다. 최고가 아니라 최선에 치를 떨어야 하고. 화가가 아니라 작가라서 그럴까. 나는 작가라기보다 잡부일 것 같다. 염색공, 용접공, 미장공, 타일공, 페인터, DJ, 전기공, 운전사, 배달꾼, 디자이너, 농부, 도예가, 사진가, 그러다가 누구의 선생이 되기도 하고.작가가 되면서 캔버스 작업과 인연을 끊었다. 미술학원도 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나는 나를 해체하고 있었다. 마르셀 뒤샹 이후 현대미술이란 사실 사망 선고를 받았던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그림=작가'란 도식을 경멸했다. 나는 그림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그건 서울대 미술대 3학년 재학생 10명으로 구성된 벽동인이 덕수궁 서쪽 정동 골목길에서 반국전 시위 차원의 가두전을 감행한 혈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계명대 미대 시절, 지도교수였던 정점식과 잦은 갈등을 빚었다. 나는 별로 유별스럽지 않았는데 그는 내가 어디로 튈지 몰라 늘 노심초사했다. 존경은 하면서도 그에 대한 서운함이 많았다.염색공·타일공·디자이너·도예가작가라기보다는 잡부 같은 삶 지상의 모든 물성이 내 영감의 출발연도별 시리즈를 작품명으로 지어작가의 절정은 절망으로 갈무리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성은 내 영감의 출발이다. 상관없어 보이는 물건을 연결해 새로운 작품으로 품어냈다. 그 오브제가 절정에 가까워질수록 문명의 몫이 아니라 자연의 몫으로 승화하는 걸 나는 경험했다. 내가 창작자이면서 감상자이고 비판자여야만 했다. 나는 작품에 제목 다는 게 싫다. 그래서 연도별 시리즈를 작품명으로 대신해 왔다. 설치작업이 주종이다 보니 여느 갤러리와 무관할 수밖에 없었다. 판매와 무관할 수밖에 없었다. 곧잘 절벽에 도달한 심정이 들면 혼자 이렇게 독백한다. '작가의 절정은 항상 절망의 방식으로 갈무리된다.'철저하게 '묻힌 김영진'이었고 그러면서도 늘 '시한폭탄 김영진'이었다. 아득한 과거이면서도 유구한 미래가 되고 싶었다. 전략적이고 설계적이고 정제된 걸 경계한다. 완성일 것 같은 작품을 파괴할 때가 많다. 순간 파고드는 우연한 흔적이 가장 예술적이었다. 잘 되고 다 된 것 같은 걸 경계해야 된다. 몸통을 버려야 할 때가 많다. 오히려 거기서 바스러져 나온 조각, 혹은 녹물 같은 게 예술의 진면목일 수 있다. 자연은 그렇다. 내색하지 않고 작정하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모든 만상을 제자리로 회귀시킨다. 그 저의는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 자연한테 노벨상을 줄 수 있는 자가 누군가. 준다 해서 받을 자연이겠는가. 영원에 걸쳐 주야장천 변화만 하는 그러면서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저 무적의 힘 앞에 나는 아직 할 말을 잊는다. 그래서 가능한 하늘을 올려 보지 않으려 한다.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는 게 낫다. 습관적으로 기상하자마자 두 시간 남짓 남산을 거닌다. 거기서 작품의 모티프를 얻는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내 생의 몇 장면이 있다. 그건 한국 현대미술의 몇몇 변곡점이었다고 믿는다. 하나는 1960년대 서울대 미술대 옆 교내 카페로 불렸던 '빌라다르(Villa d'art·'예술의 별장'을 뜻하는 프랑스어)' 시절, 1972년부터 시작된 서울 앙데팡당전 시절 그리고 1974~79년 대구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총궐기 같은 '대구현대미술제' 시절이다. 나는 그 세 흐름의 본류를 걸어왔다. 그래서 몸과 맘, 영혼에까지 신경망처럼 연결돼 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1974~79년 대구현대미술제의 5명의 산파역 중 한 명인 작가 김영진. 경주 남산 자락에서 은거 중인 그는 지난 50여 년 사투에 가까운 3천여 점의 실험예술에 올인했다. 덕분에 오는 5월 대구미술관 그리고 올해 한국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공동기획 순회전에 초대를 받았다.경주 작업실 실내 전경.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시노래 싱어송라이터 진우
한국의 '시노래' 전통은 일천한 것 같은데 상당히 장구하다. 일반 전통가요와 성인 트로트 그리고 록뮤직, 여느 유행가는 가수한테 맞는 가사를 절묘하게 만들어 내는 전문 작사가의 몫인 경우가 많다. 양인자가 조용필에게 준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그 겨울의 찻집', 김국환의 '타타타' 등은 그 어떤 시인의 시보다 더 시문학적이었다. 김민기, 한대수, 조동진,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김광석, '어느 산골 소녀의 사랑이야기'를 지은 예민, '사랑으로'의 이주호(해바라기 리더), 이문세에게 노래를 준 이영훈 등도 음유시인의 반열에 들어간다.하지만 시노래란 장르는 빼어난 시인의 시 그리고 그 정서를 이해하는 작곡가가 매칭되었을 때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정호승의 시와 인연이 깊은 안치환,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을 노래로 만든 송창식, 김소월의 '개여울'을 노래로 부른 정미조, 이동원과 박인수의 향수(정지용 시인) 등도 한국 시노래의 출발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 진우, 김현승, 백창우, 박경하, 김무한, 성경원, 이경민 등도 국내 시노래 문화 저변 확대에 일조했다. 특히 경남 합천 출신으로 대구에서 성장한 진우(61)는 23년 구력의 자타가 공인하는 시노래 싱어송라이터이다.성악가보다 적성에 맞는 대중가수공연 행사 종합이벤트사에 몸담아 지역 대표 시인들이 제안한 시노래 詩에 맞는 멜로디·리듬·템포 작곡낭송·낭독과 차별화 콘서트 마련 내가 만든 시노래 직접 부르며 전파삼국유사 노래·이상화 시노래음반 다양한 문화 공연 총연출 진두지휘 ◆성악가에서 변신합천군 율곡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내 대구로 건너와 양복점 주인이 된다. 그는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랐다. 그림쟁이·음악쟁이·글쟁이의 유전자를 겸비했다. 그림대회는 물론, 신라문화제·진해군항제 음악콩쿠르에서도 큰 상을 받는다. '화가냐, 성악가냐, 때로는 시인이냐 그게 문제'였던 학창 시절이었다. 결국 그는 성악을 잡는다. 중앙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겉으로 보던 것과는 달리 실제 강단에서 전문적으로 성악가의 능력을 키우는 과정은 너무 학문적이고 구속도 많아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클래식보다 대중가수적 기질이 강했다. 틈만 있으면 라이브카페에서 대중가요와 팝송을 불렀다.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김민기의 '친구',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 등을 부를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제대했지만 복학하지 않았다. 자연 성악가의 길은 지워진다. 서울 생활을 접고 대구로 내려왔다. 옛 중앙상고 근처에서 기타학원을 겸한 악기사를 꾸려간다. 밤에는 동성로의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악기사도 접고 중앙파출소 근처에서 '음악도시'란 레스토랑을 오픈한다. 세상의 근육을 배우던 시절이었다.점차 자기가 원하는 공연 및 음악행사를 기획·연출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놀레벤트, 파워이벤트 등 대구 1세대 공연기획사가 출범하는 흐름과 맞물려 그도 '이벤트피아'란 종합이벤트사를 오픈한다. 직접 노래 부르는 일은 잠시 중단하고 대구은행 창사기념, 대구장애인의 날 행사 등을 꾸려갔다. 그렇게 삼십 대 시절은 그럭저럭 흘러가 버렸다.◆마흔에 만난 시노래시조시인 겸 시낭송가로 활동 중인 곽홍란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기철, 문인수 등 지역의 대표 시인 10명의 시를 갖고 CD를 제작해 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자리에서 시노래를 불렀지만 큰 사명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계열의 노래를 좋아하고 흥얼거리는 수준이랄까. 그런데 지역에서 나름 잘나가는 시인의 시를 갖고 곡을 만들어 달라고 하니, 엄청나게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 유랑자처럼 경험했던 여러 예술적 끼를 전문적으로 융복합해야만 했다.일단 시를 정독했다. 한 편의 시에 숨어 있는 울림의 각도를 기승전결로 분석해 나갔다. 그리고 그 시에 맞는 멜로디와 템포, 리듬 등을 찾아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편곡자에게 편곡을 의뢰하고 그걸 토대로 반주 음악을 형성하고, 마지막엔 직접 스튜디오에서 노래하며 음반을 제작해야만 했다. 어렵사리 10곡의 시노래가 작곡된다. 동아쇼핑 비둘기홀에서 시노래 음반 기념 콘서트를 가졌다. 하지만 역시 일반인에게는 시노래란 장르가 생소했다. 대다수 시낭송의 연장이라 여겼다. 낭송·낭독·노래의 차이점, 그는 그걸 사람들에게 각인해야만 했다.그 무렵 김현승이 이끄는 시노래 단체인 '느린 달팽이'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시노래를 갖고 단독 콘서트 형식으로 엮은 건 그가 가장 선두적이었다. 그가 시노래를 시작할 무렵 통기타 라이브카페 붐이 일어났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GOD, SES 등 브레이크댄스를 앞세운 힙합문화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신세대의 음악과 기성세대의 음악, 그 불일치의 접점을 파고들었다. 음악적으로 소외받을 수 있는 폐교 직전의 오지 학교를 찾아 자신의 시노래를 전파하고 싶었다. 다행히 정부에서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성사된 게 군위군 고로중·고 등 100명 미만의 외딴 학교를 중심으로 시노래 투어 콘서트를 진행했다. ◆시노래는 어떻게 생산되나"여보세요. 시노래풍경 진우 선생님이시죠. 저는 인천에 있는 문학단체 사무국장인데요. 혹시 이번 주말에 시노래 공연을 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가 시 두 편을 보내 드릴 테니까 작곡해서 시노래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10년 전 어느 문학단체 관계자와 통화한 내용이다. 이렇게 요청을 받으면 대략 두 주일 안에 작곡을 하고, 완성된 시노래를 행사장에서 부르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노래를 직접 부르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인천에 있는 문학단체 행사장까지는 승용차로 왕복 8시간 거리. 그는 그 긴 시간을 대개 혼자서 차를 몰고 다닌다. 정작 출판기념식과 문학공연, 문학제 등 각종 행사장에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7분이다. 노래 두 곡에 그의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대개의 문학행사는 음향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음향시스템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는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경우도 많다.무대에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면 되돌아오는 4시간은 지옥과 같다. 반대로 만족스럽게 공연을 마치면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름대로 행복해진다. 간혹 문학이 아닌 회화와 서예, 서각 등의 전시 개막행사에서 공연을 하며 외도를 하기도 하지만 그와 문학은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게 분명하다.◆시노래 저변 확대그도 시노래 갖고 오디션 스타 박창근, 김호중, 임영웅처럼 유명해질 뻔했다. KBS '낭독의 발견'이란 코너에도 초대돼 김선우 시인의 시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직접 작곡해 노래를 불렀다. 반응이 좋았다. 재차 MBC에서 러브콜이 들어왔다. 충북 옥천에서 진행되는 매머드 행사에 메인으로 출연 교섭을 받았다. 그는 혼자 너무 오버했다. 뭔가 한 방을 보여주기 위해 7인조 밴드를 급조했다. 하지만 연습도 부족했고 결과는 참담. '그럴 바에는 차라리 통기타 한 대로 담담하게 노래를 불렀으면 더 좋았겠다'고 후회한다. 그날 이후 그는 중앙을 겨냥하는 야심을 버렸다. 그냥 '순리대로 시노래 하는 진우'로 살다 죽기로 맘을 먹는다. 그런 마인드 덕분인지 다양한 시노래 관련 공연을 총연출할 기회가 자주 주어진다. 대표적인 게 도권 스님과 함께 진두지휘한 군위 인각사 '삼국유사문화축전'이었다. 그걸 계기로 삼국유사 관련 4편의 뮤지컬을 제작한다. 단군, 조신의 꿈, 수로부인, 그리고 비형랑이다. 2014년 행사 때는 고은 시인이 쓴 '일연찬가'를 노래로 만들어 직접 노래했다. 서예가 율산 이홍재는 커다란 붓을 이용한 타묵 퍼포먼스를 펼쳤다. 2012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대한불교조계종 대승사(주지 철산 스님)에서는 '대승사 문화축제'도 연다.그의 시노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국의 여러 시인을 품었다. 시인이 먼저 요청해서, 자신이 좋아 보여 시노래를 작곡했다. 일반 공연무대와 일반 시낭송회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게 적중했다. 한동안 그는 대구문인협회 전속 시노래가수로 활동하다시피 했다. 시노래 특수 덕분이다. 시낭송의 단조로움을 해소해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전방위로 뻗어 나갔다. 시노래만 1천400여 곡을 작곡했다. 삼국유사의 노래, 이상화 시노래음반, 2017년에는 시노래음반 9집을 펴냈다. 김달진문학제, 대구포크페스티벌 등 여러 문화 공연을 진두지휘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시문학과 시낭송을 노래로 갈무리해 나가는 시노래 전도사 진우씨.삼국유사의 노래 음반.민족시인 이상화 시노래 음반 7집.
문학인 등과 '9인 9색' 시노래 콘서트
그가 올해 큰맘 먹고 독특한 형식의 시노래 행사를 준비했다. 오는 2월3일 오후 6시 동구 팔공산 카페 베이원(Bay1·동구 서촌로 111)에서 열리는 '9인 9색 시노래 콘서트'다. 지난 23년 시노래 인생을 중간 점검해 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동안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문학인 등과 시노래 카니발을 여는 것이다.율산 이홍재는 시인(조명선, 서정남, 김창제, 문성희, 감현국 임서윤, 김석, 김미정, 손수여, 정원호)의 낭송 시화를 직접 붓글씨로 적어 액자로 전시한다. 낭송가는 성영란, 이정화, 김경련, 김정희, 김영숙, 노유정, 홍정숙, 김옥희, 김중구 등이다. 시낭송과 특별 연주 사이에 등장해 그가 작곡한 시노래를 부르게 된다.1부는 시의 의미, 2부는 인간사, 3부는 지역성을 주제로 다룬다. 이를 위해 첼리스트 강재열, 피리연주는 박세홍, 사진작가 견석기, 영상감독 이승대 등이 의기투합을 했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겨울 땅속에서 얼굴 내민 봄 전령사
설중화(雪中花). 나는 매년, 이 무렵이면 한 계절 앞서 겨울 속 봄을 친견하려 한다. 지구온난화 탓일까. 예전 한겨울에는 상록수를 제외하곤 모든 수목과 풀이 잎을 다 날려버리고 동면에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한 잡초는 설한풍에도 견딘다. 앞산순환도로 개나리는 한겨울부터 개화를 시작한다. 불분명해진 계절이다.역시 동백꽃이 가장 빠르다. 제주도~남해안~서해 마량포구까지 광대역으로 이른 봄을 설한풍 속에 전해준다. 사실 동백꽃은 사철 핀다. 서귀포시 안덕면에 가면 동백꽃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테마식물원 '카멜리아힐'이 있다. 요즘 이곳은 동백기름이 들어간 동백꽃빵이 상종가를 치고 있다. 5대 동백꽃 명소는 서귀포권에 몰려 있다. 호근동 '숨도'(옛 석부작박물관), 상효동 '상효원', 남원읍 위미리 '제주동백수목원', 남원읍 '동백포레스트' 등이다. 제주동백수목원은 국내에서 가장 큰 수령 45년생 이상의 애기동백나무숲이 있다. 제주도를 벗어나면 신안군 압해도, 여수 거문도, 통영 욕지도,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 서해 마량포구 동백정까지 퍼져있다. 이듬해 4월까지 북상한다. 신안군 압해도 분재공원에는 애기동백나무 2만그루가 3㎞ 구간을 수놓는다. 역시 전령사로는 수선화가 제격인 것 같다. 지난 1일 제주도 한림공원 수선화 공원 내 30여만 그루의 수선화가 만개했다. 한국 수선화의 양대 산맥은 제주도와 거제도이다. 여타 다른 지역의 수선화는 대부분 유럽에서 개량한 원예종이다. 꽃 전체가 노란색인 것이 많다. 거제도 수선화는 흰색 꽃잎에 컵 모양의 노란색 부화관(副花冠·덧꽃부리)이 조화를 이룬 '금잔옥대(金盞玉臺)'다. 금 술잔을 옥대에 받쳐놓은 모양이라는 뜻이다. 제주도에 피는 수선화는 두 종이다. 하나는 꽃이 크고(몰) 속 꽃잎이 마늘(마농) 뿌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제주도 방언인 '몰마농꽃'이라고 불린다. 제주 수선화는 부화관 없이 꽃 가운데에 꽃잎이 오글오글 모여 있는 형태로 11월부터 3월까지 폭넓게 개화한다. 서예가 겸 제주대 강사인 오창림씨는 수선화를 제일 먼저 언급한 이가 추사가 아니라 오정빈이라고 주장한다. 정의현 최초의 문과급제자인 오정빈(1663~1710)이 '수선화'라는 제목의 7언절구 두 수를 통해 싸늘한 은대에 얹어진 따뜻한 금잔의 대비로 수선화의 고혹적 자태를 실감 나게 표현했단다. 지난 11일 오전, 대구수목원에 연락했다. 매화보다 빠른 복수초와 납매·풍년화는 아직 피지 않았단다. 원래 납매(臘梅)는 음력 12월(섣달)에 피는데 중국에서 건너온 수종이다. 언뜻 보면 난초 꽃 같은 기품을 갖고 있다. 풍년화는 꽃 둘레에 화분이 촉수처럼 매달려 있어 인상적이다.월동채소도 겨울 속 봄을 알린다. 제주도 무, 당근, 양배추, 해남 김장용 배추, 그리고 포항 호미곶면으로 가면 구룡포권과 맞물려 벨트화된 과메기는 물론 보리와 시금치까지 한 세트로 체험할 수 있다. 특히 구만리~대보리~강사리 해안 언덕배기로 가면 해풍을 먹고 자란 '포항초(겨울 시금치)'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동절기 시금치의 양대 산맥은 포항에서 나오는 '포항초'와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나오는 '섬초'다. 포항초도 여러 문파가 있다. 호미곶에서는 '해풍시금치', 칠포해수욕장 근처의 '곡강시금치', 이 밖에 청림동, 연일읍, 동해면 등에서도 출하된다.국내 시금치는 대개 두 가지 종자로 나뉜다. 봄에 파종해 여름에 먹는 종자는 서양계다. 병충해가 적고 더운 기후에 잘 크는데 대신 맛이 싱겁다. 여름에 먹는 시금치들은 다 이 종류다. 이와 달리 가을에 파종해 겨울에 수확하는 포항초·섬초들은 모두 동양계. 포항초는 한때 '해도시금초'로 불렸다. 남해안 해풍쑥도 전령사다. 아직 한산도와 욕지도의 해풍쑥이 나지 않아 통영 강구안 도다리쑥국은 못 팔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령 대가야시장 '미주식당'은 벌써 개시했단다. 조만간 거기나 갔다 와야겠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납매, 수선화, 포항초, 동백꽃.
[동대구로에서] 죽음보다는 일상
일상의 본질은 '변화무상', 계절은 '반복', 세월은 '중화'. 그러니 일상파는 돈, 계절파는 순리, 세월파는 초연함에 길든다. 문제는 세월파. 그들 상당수는 초월의 종족이다. 그 종족은 구도자와 성직자로 나눠진다. 성스러움의 원천은 바보스러움과 침묵. 역설적이게도 더 똑똑하고 웅변스러운 세속이 그를 섬기려 든다. 그러나 성스러움에도 폭압적인 구석이 있다. 모든 걸 신으로 회귀시켰던 중세의 성직. 지금 잣대로 본다면 '시대착오적 악령'이란 기분도 든다. 요즈음 스마트폰 때문에 갈수록 성직과 속인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종교의 평균적 권위는 추락, 동시에 극단파 종교는 더욱 분기탱천. 덩달아 종교를 버린 자연주의자도 증가 중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그냥 자연의 순리대로 살다 죽겠다는 거다. 하지만 자연은 묵묵부답. 자연은 일상·계절·세월이 될 수 없다. 인간에게 '수(手)'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균형점을 알려주는 '저울', 모든 걸 비춰 주는 '거울' 같다. 인간이 한 짓을 그대로 되돌려준다. 선한 건 선하게 악한 건 악한 방식으로. '자연의 계시'일까? 그건 경고도 메시지도 교훈도 아니다. 그냥 인간의 자업자득일 뿐. 인간이 자초한 불행인데 종교는 자연이 조물주(신)란 방식으로 인간 세상을 '심판'한다고 풀이한다. 거기서 '지옥'이란 개념이 파생된다. 자연은 사실 전략·전술이 필요 없다. 빅뱅, 블랙홀, 중력, 전자기력 등 우주의 기본 에너지 시스템에 의해 만상(萬象)을 자동적으로 돌려준다. 소멸과 탄생이 기막히게 맞물려 돌아간다. 오직 '파괴적 균형'의 방식으로 우주를 유지한다. 절대 자유인 동시에 절대 평등이다. 모든 항성·행성·위성도 유한하다. 언젠가 파멸되겠지만 그 파멸의 자리에서 새로운 시스템이 탄생한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란 명저를 통해 피력한 바 있다. 자연을 지배하는 건 자연의 순환뿐. 순환법칙은 과학자들이 거의 다 밝혀놓았다. 덕분인지 산업혁명 이후 3세기 동안 인류는 참 기고만장하게 살았다. 그 편리함이 되레 자연을 오작동 되게 만들고 사람들의 빈익빈 부익부가 이데올로기 전쟁을 가속화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지구온난화, 그건 결국 인류가 인류를 향한 선전포고다. 자본의 독점·폭식성에 기인한 '환경파괴'란 핵전쟁이 먼저 터져버렸다. 자연도 매 순간 죽는다. 하지만 그 죽음은 즉시 '탄생'으로 이어진다. 인간도 매 순간 죽으면서 새로 태어난다. 완벽한 죽음이란 없는 건지도 모른다. 한 개체는 소멸할 뿐 계통은 자식이란 유전자를 통해 계속 살아있다. 계묘년 벽두,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잠시 내려놓자. 죽음보다 수천 배 더 풀기 어려운 일상의 온갖 문제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극빈, 테러, 중독, 왕따, 성폭행, 폭력, 마약중독, 연금 고갈…. 그건 기도로 해결되지 않는다. 투표로도 해결 안 된다. 혁명도 역부족. 해결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종교란 '충전소'에서 정신 차린 뒤 우리는 다시 일상이란 전장에 나서야 한다. 그게 정치와 시민 정신의 출발이다. 세상 너머 일상이 삶의 종착역 아닐까!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
룰리(Rully)커피, 집에서도 쉽게 즐기는 드립백…원두 7종류 엄선, 현지 못지 않은 신선도·풍미로 승부수
요즘 지역에서 신개념 드립백 커피 시대를 열고 있는 커피 브랜드가 있다. 바로 녹색 바탕에 흰색 제비 이미지가 인상적인 로고를 가진 '룰리(Rully)커피'. 다들 벤치마킹한 수십 종의 빵을 커피와 매칭하는데 이 커피는 오직 커피 하나에만 목숨 건다.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획일적인 베이커리카페 신드롬과 확실하게 선을 긋겠다는 고집이다.경북대 미대를 졸업한 미술학도였던 김철우 대표 그리고 같은 대학 음대 국악과 출신인 김미경 부대표, 동문끼리 의기투합했다. '룰리'는 김 대표의 닉네임. 그는 서울에서 '세븐 몽키스'라는 프랜차이즈 가맹점 관리 업무를 시작으로 커피 인생을 걷는다. 2007년쯤 경북대 북문 근처에서 몽키스 대구점 오픈 작업을 5년쯤 주도를 하면서 점차 독립한다. 2012년 고모역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한적한 만촌동에서 로스팅회사 엑스팩토리를 창업한다. 그 엑스가 드립백커피와 매칭되면서 룰리커피로 발전한 것.김 대표는 비록 한국이 커피 수입국이지만 그 신선도와 풍미에서만은 현지 못지않은 퀄리티를 유지하고 싶었다. 기준과 원칙을 확고히 했다. 그리고 너무 복잡하고 까다롭지 않게 집에서도 쉽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드립백 커피 보급에 역점을 둔다. 2013년부터다. 그리고 2019년 승부수를 던진다. 평소 눈여겨봤던 만촌동의 변두리에 멀리서 보면 꼭 우체국 같은 커피공장을 차린다. 그때만 해도 드립백(10g)커피란 개념이 생소했다. 상당수 어떻게 타 먹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홍보차 커피 한 잔을 먹으면 드립백 한 개를 선물로 주었다. 너무 복잡한 커피 원두 종류 그리고 추출법, 주문법. 그는 단순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초창기에는 원두 분쇄 정도를 10등급으로 나눠 각각의 물성을 다 연구했다. 매일 로스팅한 걸 직접 체크했다. 맛의 강도는 약배전 같은 중배전을 추구한다.매장이나 집에서 먹는 거나 비슷한 맛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콜롬비아, 브라질, 에티오피아, 인도네시아, 과테말라, 케냐 등 7종류의 원두를 엄선한다. 원두 매입가에 상관없이 가격은 동일하게 6천500원. 로스팅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송창한·장준영·최재혁이 하루 800㎏ 이상 로스팅한다. 2020년부터 코스트코에서도 러브콜이 왔다. 추후 호텔, 백화점 등에서 입점 권유를 받았지만 초심을 위해 고사했다. 인쇄물 등 일거리가 있으면 가급적 지역 업체에 몰아준다. 덕분인지 지난해 대구 프리스타기업(벤처기업)에 선정된다.최근 2호점(가창점)을 오픈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빵이라곤 바게트 한 개가 전부. 드립백의 경우 7개 1만원, 14개는 1만5천원, 36개 한 박스는 2만8천원. 룰리 덕분인지 이제 커피숍은 대화 이상으로 맛을 따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드립백 커피 선두주자인 룰리커피.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전 칼국수…쑥갓, 들깻가루, 오징어 조합…깔끔·얼큰·매콤한 맛으로 반세기 역사
대전은 이렇다 할만한 먹거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작 1954년부터 장사를 하기 시작한 대전역 근처 성심당 빵집이 제 목소리를 내는 정도다. 81년부터 '튀김소보로'로 천하평정을 했다. 성심당문화원까지 생겼으니 이제 빵이 아니라 '문화'로 자릴 잡았다. 그다음으로 강력한 먹거리는 단연 국수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대전의 국수파워를 실감하지 못했다. 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만 대선, 경동, 신도, 공주 등 얼추 500곳, 대를 이어가는 집도 20곳이 넘는다. 2019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칼국수 축제'를 개최한다. 대전 '칼국수 축제 평가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칼국수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부터라 한다. 대전 칼국수는 1900년대 대전의 근대화가 맞물려 탄생하게 된다. 과거 대전은 근대 철도 물류의 거점이었다. 대전역 주변으로 제분공장들이 속속 생겨난다. 더욱이 당시 서해안 간척사업 노동자의 노임으로 밀가루가 지급되며 환전을 목적으로 밀가루가 모여들어 대전이 칼국수 집산지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아무튼, 한국 국수지형도가 대구~부산~대전권으로 균분된 것 같다.◆가장 오래된 대선칼국수최근에 유명 유튜버인 쯔양이 다녀갔는데 조회 수가 200만건이 나왔고 이후 젊은 손님들이 제법 많아진 대선칼국수. 대전 출신 배우 송중기의 단골집으로도 유명하다. 칼국수로만 보면 종가격인 식당이다. 1954년 대전역 앞에서 시작했다. 외손자 목인성(52) 대표의 외조부 고(故)오영환 대표가 대전역 앞에서 포장마차 형태의 건물에 나무 의자와 탁자를 놓고 시작했다. 60년대 옛 아카데미 극장 앞으로 옮겨 운영했고 1990년 어머니인 오세정(75) 전 대표가 당시 대전 칼국수 본거지였던 대흥동에서 문을 열었다. 현재의 대전시청점은 2001년 원도심에서 관공서들이 이전함에 따라 함께 옮겨왔다. 어머니가 2대 운영자로 나선다. 딸 오세정 전 대표에 이어 목 대표가 3대 사장으로 자릴 잡는다.특히 어슷하게 썬 돼지 수육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최단 시간 내 숙성시킨 묵은지가 절정의 하모니를 이룬다. 수육 한 점을 묵은지에 싸 먹었다. 무릎을 쳤다. 어떤 이는 국수보다 이 수육과 김치 맛 때문에 여기를 찾는다고도 한다. 여기에는 대구와 달리 된장이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초고추장이 있다. 수육용이다.1954년 부터 70년 세월 대선칼국수송중기 단골집·쯔양 먹방 유명세 오징어 두부두루치기 별미도 인기사골·멸치육수 소문난 신도칼국수푸짐하게 내어주는 경동오징어국수육개장에 칼국수·만두 담은 '육칼두' 집밥같은 정성 담은 유성할매국수국수는 칼국수 스타일은 아니다. 대구의 금와식당처럼 공장표 국수인데 쫄면 굵기다. 멸치 육수가 숭늉처럼 나온다. 냉면집 온육수 같다. 수육부터 먹을 때 탕국물처럼 먹으면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전에서는 칼국수 고명으로 쑥갓을 많이 사용한다. 또 한 가지 별미가 있다. 오징어를 이용한 별미가 꽤 성행한다. 대표적인 게 오징어가 들어간 두부두루치기. 이 집에도 그게 인기다. 비빔국수는 함께 나오는 칼국수 국물을 넣어 가며 양념장과 함께 살살 비비면 된다. 비빔국수 양념은 붉은 편이지만 맵지 않고, 고소한 참기름 맛이 느껴진다.◆기타 대전 국수 명가정동 '신도칼국수'도 한목소리를 낸다. 1961년에 개업한 소문난 칼국수 맛집. 진한 사골육수 베이스의 칼국수가 카리스마 가득하다. 꼭 참깨를 뿌려놓은 콩국수 같다. 사골육수와 멸치육수의 조합으로 탄생한 국물이 인상적이다. 별다른 고명 없이 고소한 들깻가루만 뿌려져 있다. 면을 맛보기 전 국물을 먼저 떠먹어 봐야 한다. 과음한 다음 날 해장용으로도 딱이다. 벽에 연대별 국수 그릇을 전시해놓았다.동구 성남동에 위치한 '경동오징어국수'는 허영만의 백반기행에도 소개된 명소다. 포스가 정말 강렬하다. 오징어짬뽕 같기도 하고 대구의 중앙반점의 오징어를 섞어놓은 야키우동으로도 보인다. 1979년 창업한 김종숙 사장의 뒤를 이은 아들 변용훈 부부가 운영한다. 이 국수는 커다란 시골양푼에 멸치육수에 삶은 면을 두부오징어두루치기와 섞어 손님상에 낸다. 양도 푸짐하고 큼직하게 썬 대파와 간이 적당히 밴 면발이 두부두루치기와 어우러져 시원하면서 매콤하지만 깔끔한 맛을 준다.대전역 부근 '소나무집'은 반세기 역사의 오징어국수 명가다. 재료는 총각김치묵은지, 오징어, 국수사리 세 가지. 매년 가을 총각김치를 담아 1년 정도 묵힌다. 총각김치묵은지를 꺼내 무를 얇게 썬다. 오징어와 국수사리는 그때그때 준비한다. 당시 오징어국수가 먹고 싶다는 한 단골손님의 요구에 김장김치를 꺼내 오징어와 함께 끓여줬더니 호평이 쏟아졌단다. 반찬도 총각무 하나가 달랑. 더 이상의 반찬은 필요하지 않다. 대전 유성구 '유성할매국수'는 음식에 집밥의 정성이 스며있는 곳이다. 겨울에는 육개장, 칼국수, 만두가 어우러진 '육칼두'가 인기다. 칼칼한 육개장에 수제 칼국수와 만두를 푸짐하게 담아준다. 육칼두의 기본은 맛있는 육개장이다. 사골과 잡뼈를 진하게 우려내다가 양지와 사태를 넣고 함께 끓인다. 대파와 고사리도 푸짐하게 넣는다. 손수 만든 향신 기름은 국물을 칼칼하고도 깔끔하며 매콤하고 잡내가 없도록 만든다. 유성구 봉명동 도안6단지 센트럴시티 610동 앞에 있는 '진월당'은 죽 전문점으로 여름별미 콩국수로 명성을 얻는 집이다. 2008년 한국인 첫 우주인이 된 이소연 박사가 우주에서 돌아오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엄마 표 콩국수'를 꼽아서 화제가 됐다.서구 탄방동 '대복국수'는 제주식 고기국수 같은 '쫄데기 비빔국수'가 유명하다. '쫄데기'는 돼지 앞다리 사태 부위로 충청도 방언. 속까지 간이 쏙 배어든 쫄데기 수육이 완성되면 잘 삶아진 소면에 올려 대복국수만의 비법으로 만들어진 양념장을 넣고 비비면 된다. 이 양념장의 비법 재료는 시원하고 개운한 맛을 내는 동치미에 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대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대선칼국수신도칼국수경동오징어국수대선칼국수 입구 모습.신도칼국수 벽면에는 역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시대별 그릇이 전시돼 있다.이춘호 전문기자
[새날] '전통초가 지킴이' <주>바우 박정호 대표…서울서 패션사진가로 살다 고향 예천 금당실마을서 전통초가 살리기 매진
지난해 12월23일 흥미로운 세미나가 예천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렸다. 문화재청과 경북문화재단이 지원하고 농업회사법인 <주>바우 박정호 대표와 이종주 시인이 총괄 기획한 '손 이엉 전통 초가 어떻게 할 것인가'란 세미나였다. 모두가 망각하고 있던 초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형남 한국민속촌 학예사, 이호응 <사>한국저작권법학회 명예회장이 주제발표를 했다. 박 대표는 전통초가 현장사례를 발표하면서 현재 국내 초가의 현주소와 개선 방향에 대해 진단을 했다.◆초가 품은 패션사진가기자는 멸종 수순을 밟고 있는 전통 초가(草家)를 지키려는 박 대표의 마인드가 매우 귀해 보였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예천으로 갔다.그는 환난당할 가능성이 없어 한국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으로 불리는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마을 출신. 그는 거기 부모가 살던 한옥인 우천재(愚泉齋)에 살고 있다. 그는 올해도 지인들과 함께 대문채 지붕 초가를 직접 이었다.계명전문대 사진학과 출신인 그는 상경, 한때 패션사진가로 꽤 잘나갔다. IMF 외환위기 이전, 많이 벌 때는 하루 460만원도 벌어봤단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귀중한 패션 사진 도난 등으로 10억원 이상 빚을 지게 된다. 빚쟁이의 나날이었다. 잇단 악재로 재산을 다 날리고 반지하에서 살며 실내포차까지 운영해야만 했다. 이게 아니다 싶어, 미련 없이 서울 생활을 접고 2008년 여름 귀향한다. 고향 떠난 바우의 낙향, 하지만 금당실은 그를 오매불망 기다려준다. 그가 나타나자 마을의 조도가 확 밝아진다. 그는 '금당실전통마을보존회' 으뜸 머슴을 자청한다.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한 22세기형 마을 만들기에 돌입한다. 우선 전통문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를 했다. 일환으로 전통음식 만들기를 시작했고 그 첫 단추는 된장이었다. 10가마 이상 콩을 삶아 메주를 매달았다. 반응이 좋아 금세 다 팔린다. 현재 마당 옆 장독대에 놓인 100여 개의 옹기가 당시 일의 치열함을 암시한다. 새마을운동으로 역사 뒤안길 초가전국 각지 상당수가 정통 아닌 짝퉁고향마을에 韓초가 메카 만들자 다짐볏짚 묶고 건조 작업 인원 20명 투입 인건비도 10여 년 전보다 3배나 올라1인당 하루 8m이엉 13개 정도 엮어 짧은 벼종자 개량, 긴볏짚 구입 어려움 전통초가로 만든 시범마을 조성 필요 초가장인 등 지원…젊은층 유도해야◆내 별명은 바우그는 말투도 무척 우직하고 뚝심도 강하다. 그래서 예천 대창고 시절에는 담임선생으로부터 '바우'란 별명을 얻게 된다. 바우정신은 잠시 그를 패션사진 전문가로 만들어주었지만 이내 그게 천직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예전에 보지 못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게 바로 전통문화의 가치다. 그 1탄이 된장 담그기, 2탄은 초가였다. 콘크리트 건물이 대세가 된 지 오래다. 그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다. 그 시절 민초의 마지막 보루였던 초가, 그게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그걸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볏짚을 갖고 이엉을 만들어 초가를 수작업으로 이기 시작한다. 현재 금당실마을에 얼추 300여 호가 모여 있고 그중 32동이 초가다. 지난해에는 금당실은 물론 전국 각처를 돌며 모두 70여 동의 초가를 이었다. 시장조사를 해봤다. 볏짚의 국내 수급 상황, 초가 전문가 숫자, 각종 민속촌, 대하사극 세트장에 등장하는 초가 관리 실태 등. 그 과정에 상당수 초가가 정통이 아니라 짝퉁이라는 걸 절감한다. 금당실마을을 한국 초가의 메카로 만들자고 다짐한다. 2010년 10여 명을 규합하면서 노원균 등 솜씨 좋은 어르신을 멘토로 영입해 기술을 전수한다. 3칸 초가에 이엉을 올리려면 볏짚이 300단 이상 필요하다. 평균 하루 1~2동 정도 커버할 수 있다. 이엉은 매년 11월 중순부터 한 달 남짓 이어진다. 현재 바우 정예 멤버는 박노경, 최성열, 김영구, 권오혁, 강건모, 안진만, 박정희, 민병현, 이상대, 신현민, 김원덕 등 이다.◆초가 이엉 교체 작업볏짚으로 이엉을 엮고, 그걸 돌려가며 지붕을 덮고, 새끼로 묶은 뒤 마지막에 용마루에 지네처럼 생긴 이엉으로 용마름을 하면 초가 이엉 올리기는 끝난다. 볏짚 길이는 길어야 하며(80㎝ 이상) 대공은 가늘어야 한다. 10여 년 전 볏짚 가격이 200평당 2만원 하던 것이 현재는 8만~10만원. 벼를 추수하고 남은 짚을 일정한 부피로 손으로 묶고 건조하기 위해 대략 일주일 이상 맞세워 놓는다. 이때 20여 명의 인원을 투입해서 눈비가 오기 전 이른 시간 안에 묶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경북 북부지역에선 대부분 70대 전후의 여성들이 묶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의 인건비는 10여 년 전에 3만5천원 하던 것이 현재는 9만~10만원.논에서 건조된 볏짚을 트럭과 트랙터를 이용해 작업공간으로 옮겨 바닥에 층을 지어 건물 1~2층 높이로 가려 둔다. 운송까지 완료되면 초가 작업의 50% 이상 진행된 것이다. 볏단 7~8단 정도로 이엉 하나를 완성하는데 일일이 손으로 엮는다. 1인당 하루에 평균 13개 정도를 엮는다. 완성된 이엉 길이는 약 8m.초가는 볏짚으로 엮은 이엉과 볏짚으로 꼰 새끼줄, 이는 모두 생물로 작업이 이루어진다. 기존에 습하고 썩은 이엉은 걷어내고 새것으로 채워나간다. 전체 경사도를 주면서 아래 처마(평고대)에서부터 이엉을 돌려 가며 용마루까지 올린다. 경사도를 봐 가며 작업하는 것이 '물매잡기'다. 이엉을 돌리며 꺼진 곳이 있으면 그곳엔 이엉을 더 채워가며 작업을 한다. 물매잡기가 가장 중요한 공정이다. 각기 다른 지붕의 상태를 고려해야 되기 때문에 오랜 경험과 우직한 심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습하고 썩은 곳을 걷지 않고 작업을 하게 되면 그곳은 아래에서 습기가 올라와 시간이 지나면서 여지없이 골이 지게 된다.◆초가가 잘 썩는 이유지붕 공사 시 산자를 엮고 알매 흙 작업을 하는데 이때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즉 지붕에 강회다짐을 함에 있어 경사도를 기와지붕에 맞춰 작업함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초가지붕은 볏짚의 결을 따라 빗물이 잘 흘러 내려오게 경사를 잡아야 하는데, 이를 '물매'라 한다. 물매를 잘 잡지 못함에는 이유가 있다. 대다수 초가 시공 시 기계이엉과 전통 손이엉을 사용할 수 있는데 현재 전국 대부분 초가 작업은 기계이엉을 사용한다. 손이엉은 기계이엉보다 하루 생산량이 현저히 적으나 매듭의 두께가 4배 이상 두껍다. 무엇보다 기계이엉 생산이 워낙 수월하니 다들 편리한 기계이엉을 선호한다. 지붕물매를 잘 잡고 위의 문제점 해결과 제때 초가 시공만 잘 한다면 초가지붕에 빗물이 새는 경우는 없다. ◆초가 작업의 어려움초가 이엉작업에 합당한 볏짚을 구하기가 힘들다. 초가용 볏짚은 길어야 하며 대공이 가늘며 질긴 것이 좋다. 그러나 요즘은 볏짚이 길면 가을 무렵 태풍이나 벼의 무게로 인해 쓰러지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벼를 짧고 대공이 굵은 종자로 개량하고 있고 그러한 종자를 보급하고 있다. 어느 지역에선 초가용 볏짚을 일부 수입을 하기도 한다.제대로 전통초가 작업을 이어가려면 정부에서 추청, 선진벼 등 키가 큰 종자를 엄선, 29만7천㎡(9만평) 이상에 심어야 된다. 그렇게 넓은 면적은 아니다. 예천군 관내에서도 그 넓이는 감당할 수 있다.장마철, 벼가 쓰러지거나 하면 보험처리 방법도 생각해 봐야 한다. 종일 앉아서 손으로만 하는 작업이라 무척 힘들다. 여러 달을 수작업 하다 보면 관절염 등 손가락에 무리가 온다. 특히 전통초가에 매진하는 일꾼들에게 긍지와 혜택을 주어야 된다. 현재 문화재청은 초가 전통 계승 문제에 대해 공감은 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큰 힘을 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바우와 같은 군소 업체는 전통 수리보수업체한테만 자격이 주어진 입찰제에 참여할 수가 없다. 자연 하도급을 받아 공사를 이어가야 하니 일꾼에게 주어지는 수익은 턱없이 낮을 수밖에. 예를 들어 팀이나 개인에게 전통 초가공의 인증서를 주거나 원활한 작업 수주로 보다 큰 수익을 보장해야 된다. 기계로 만든 이엉과 전통방식의 이엉으로 만든 초가의 견적에 차이를 두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전통초가의 공사수주를 입찰제가 아닌 지역책임제를 도입하여 공사수주의 과정을 단축해 그 지역의 초가지붕을 책임지게 하면 지역 초가공들에게 좀 더 많은 수익이 보장될 수 있다.◆초가 작업의 시정 제안초가를 지키기 위한 벼 종자를 길러야 한다. 전통 초가 시범마을이 필요하다. 초가에 합당한 시방서가 만들어져야 한다. 현재 제대로 된 초가 시방서가 없다. 보존 가치가 있는 초가는 순수 전통방식으로만 작업이 되어야 한다. 초가 작업은 입찰제가 아닌 책임제로 되어야 한다. 초가지붕 알매를 점차 초가에 맞는 형태로 다시 작업해야 한다. 와가 형태로 되어 있는 지붕 형태로는 물흐름이 원활치 않아 지붕에 골이 져서 쉽게 썩는다. 전통초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평균연령을 낮춰야 한다. 전국 초가 작업자의 현재 평균연령은 70대 이상이다. 앞으로 전통 초가를 10년이 아니라 100년 이상 지켜 나가려면 초가 장인의 소득을 보장해 주는 동시에 소양 및 자긍심을 고취하면서 젊은 층을 유도해야 한다. 그러려면 전통초가이엉사관학교와 초가문화진흥원 정도는 생겨야 된다. 010-3234-2238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한옥의 사각지대라 할 수 있는 전통 초가. 그걸 직접 수작업으로 이엉을 엮어 올리는 전문가는 턱없이 부족하다. 패션사진작가의 삶을 뒤로하고 고향 금당실마을로 돌아와 전통초가문화살리기에 헌신하고 있는 박정호 농업회사법인 〈주〉바우 대표가 고향집 우천재 대문채 초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용마루를 더욱 보강하는 용마름 작업. 〈사진제공=바우〉새로 이엉을 올리기 위해 해묵은 짚을 걷어내는 작업. 〈사진제공=바우〉
'계묘년'에게 보내는 편지
입문(入門) 전이거나, 입문했어도 갈 길 몰라 갈팡질팡하거나, 졸업을 했다 해도 다시 어느 길을 걸어야 할지 막막한 것. 그게 삶이겠죠. 삶은 그럭저럭 합산하면 제로(ZERO)이겠죠.매양 신년벽두(新年劈頭)는 일출의 벅찬 감정 그리고 그 감정 속에 희망과 꿈 그리고 그 곁에 행복을 장착하려 하는 인간의 맘만큼 지구를 푸릇하게 만드는 힘도 드물 것 같네요. 5, 4, 3, 2, 1, 0. 제야의 종소리가 들리고 한 해의 첫 해돋이를 마주한 순간, 그때만큼은 모두 지상에서 가장 풋풋한 미소를 피워물 겁니다. 비록 그것이 관례·관행·통과의례라 해도 말이죠. 더없이 환한 표정이지만 실제 속내까지 그럴 수는 없다는 걸 다 알아도 다 망쳐버린 일상이라지만 새해 첫날은 새로운 버전으로 새로운 심기일전의 '핑계'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다시 망가져도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희망 바이러스'가 바로 송구영신 근하신년입니다.지구의 첫날 그리고 지구의 마지막 날. 그 사이에 간이역 같은 새해 첫날이 없다면. 오직 종말만을 향해 걷기만 하는 인생이라면? 성공적 출발이 영원히 성공이거나 불행적 출발이 영원히 불행이라면, 그래서 일점일획 반전 드라마가 없는 삶은 진정 살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부모의 재산을 영원히 대물림한다면, 불행과 행복, 슬픔과 기쁨이 되풀이 안 된다면, 봄·여름·가을·겨울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변화와 반성, 후회와 결심이 없는 삶이라면? 너무도 뻔해 진정 살만한 가치도 사라질 것입니다.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다는 것, 누구도 완전한 길을 갈 수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신의 한 수 아닐까요. 일상에는 우열이 있다지만 일생은 '생자필멸(生生者必滅)'이란 기준에서 본다면 모든 게 평등하죠. 정말 명쾌한 대목입니다. 가끔 겨울밤 보일러 물이 제대로 공급되는 것만 해도 큰 위안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온기마저 언감생심인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벼랑 끝으로 밀려버린 일상, 그들에겐 솔직히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이 크게 위안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인의 가르침, 그게 큰 비빌 언덕이 되었다면 하루 100명이 넘는 한국의 하루 자살자의 수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전국 방방곡곡의 자선봉사자와 기부천사 그리고 행정복지센터와 각종 복지단체, 익명의 기부자 등. 하지만 우리의 행복지수는 절망지수를 압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 각종 경제 수치는 모두 마이너스 행진입니다. 국내 기업의 대출액이 1천조를 상회해 버렸습니다. 청년 백수의 삶은 실수가 아니라 허수가 되어버린 지 오랩니다. 결혼도 싫고, 설령 결혼해도 아이를 놓지 않고, 알바 외에는 제대로 된 직장이 없다고 믿는 삼포족 청년들의 유일한 위안이 SNS상의 '좋아요'란 댓글 팔로워라면. 노동가치는 숭고하죠. 하지만 각종 지원금, 보조금, 후원금 등에 올인하는 자들이 많아지면 결국 그 나라 경제는 '심정지' 하고 마는 겁니다. 그 시절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면 평생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죠. 그런데 지금 평생을 보장하는 직장이 공무원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오순도순한 가정을 가능케 하는 돈벌이가 너무 빨리 사라지고 있습니다. 공무원만 남고 나머지 직장은 절멸되는 상황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경제력은 여전히 세계 10위권입니다. 지옥의 대한민국, 그 변수도 무궁무진, 천국의 대한민국, 그 변수도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민족의 잠재력은 세계 최강인 것 같습니다.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을 것 같은 대한민국. 당신은 그런 대한민국의 2023년을 위해 무엇을 요구할 건가요. 아니, 무엇을 해줄 건가요. 이 나라의 주인은 여전히 있는 자가 아니라 없는 자가 아니라 자기 본분을 다하는 자들입니다. 남이 나보다 더 소중하고 대단해 보인다면, 그 국격은 미래지향적입니다. 부디 독자제현의 파워풀 월드를 기원합니다.올해 커버 사진은 지난해처럼 동구 아양아트센터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계묘년 '23토끼야전'에 출품한 작가들의 작품들입니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대구 동구 아양아트센터에서 전시 중인 계묘년 '23토끼야전' 포스트. 〈아양아트센터 제공〉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韓 신춘문예 100년' (1)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자유시의 출발
신춘문예(新春文藝)! 이게 광풍이던 시절이 있었다. 희망과 꿈은 절망에 묶여 있었지만 문심(文心)에 편승하면 우주 너머까지도 충분하게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삼천리 금수강산 방방곡곡 문학청년들은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의 총아가 될 수 있었다. 기자도 한때 문학청년이었다. 매년 12월이면 신춘문예란 계절병에 감염돼 당선용 작품이라 여기며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됐다.이번 주 커버스토리는 신춘문예. 그 100년의 세월을 시를 중심으로 음미해 보기로 했다. 이 기획을 위해 만난 시인이 있다. 신춘문예 연구에 올인한 김동원 시인이다. 그가 연대별 신춘문예 경향을 정리해 보내왔다. 기자는 그걸 토대로 신춘문예 100년을 재구성해 봤다. 1908년 11월1일 '소년' 창간호에 실린 최초의 신체시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는 한국 현대 자유시 백 년의 출발점이자 해양시의 효시(嚆矢)다.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근대 질서의 창조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1919년 '창조' 창간호에 발표된 주요한의 '불놀이'는 산문시의 신지평을 열었다. 이 시는 인간의 관능과 욕정, 꿈과 실존이 뒤엉켜 물과 불의 이미지로 녹여낸 내재율의 놀라운 리듬을 보여준다. 이후 1920년 프랑스 상징주의를 비롯한 일련의 외래 사조가 이식되어 근대 자유시의 면모는 더욱 세련미를 갖추게 된다. 이런 시운동은 창조(1919), 폐허(1920), 장미촌(1921), 백조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1927년 카프(KAPE)의 등장으로 잠시 계급문학이 주도권을 장악한다. 카프는 리얼리즘 문학의 태동이자 근대문학 발전에 또 다른 성과 중 하나다. 수많은 근대 시인의 시법은 각기 다르지만 저변에는 '전통과 근대'의 길목에서 자유시의 아름다움과 힘, 기존 질서의 부정과 계승 사이에서 집요하게 갈등하고 모색한다. 시조가 현대시조 부흥 운동으로 가닥이 잡혔다면, 근현대 자유시의 출발은 세 갈래로 뻗어 나간다. 유학생들에 의해 유입된 서구 자유시와 전통 율격을 계승 변형한 운문시, 일본 잡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신춘문예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첫 신춘문예는 1914년 12월10일 '신년문예모집' 공고를 낸 '매일신보'였다. 이에 앞서 1912년 2월9일의 '현상모집'은 신춘문예의 단초이다. 시와 소설, 서정서사(敍情敍事), 각지기문(各地奇聞), 속요(俗謠), 소화(笑話) 등 6개 부문이었다. 매일신보 1919년 12월2일의 현상모집에서는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다. 한시, 신체시, 시조, 미어(謎語·수수께끼), 만화 등도 모집했다.현상금 표현 대신 '박사진정(薄謝進呈·사례로서 얼마 안 되는 돈이나 물품을 준다)'이라 했다. 소설의 경우 1등에게는 60원, 2등에게는 30원. 당시 쌀 중급품 한 가마가 30원, 택시 요금이 1원(균일가). 첫해에는 4편의 소설과 8편의 시가가 뽑혔다. 첫해 주제는 '싸움 이야기'와 '용 이야기'였다. 이후 1925년 동아일보, 1928년 조선일보, 1947년 경향과 강원일보, 1950년 서울신문, 1955년 한국일보, 1963년 중앙일보도 가세한다. 현재 전국 일간지에서 신춘문예를 실시하는 곳은 얼추 25곳 정도 된다. 배달의 민족도 2015년부터 25자 이내 창작시를 대상으로 '배민 신춘문예'를 시작한다. 1930년대 초기 신춘문예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 단편소설의 선구자인 황순원의 동아일보 당선작 '우리의 새날을 피바다에 떠서'(1933), 김동리의 조선일보 당선작 '백로'(1934·입선)란 작품이다. 이후 그 둘은 시인에서 소설가로 변신한다. 서정주의 동아일보 당선작 '벽(壁)'(1936)은 해프닝 당선작이다. 원래 신춘문예용이 아니었는데 담당 기자가 착각해 당선작으로 뽑아서 시인도 웃게 만들었다. 조선일보 김광균의 설야(雪夜·1938·입선작) 역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韓 신춘문예 100년 (2)에서 계속됩니다.우리나라 첫 신춘문예는 1914년 12월10일 '신년문예모집' 공고를 낸 '매일신보'였다. 1919년 12월2일의 '현상모집'에서는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다. 이후 동아일보 1925년, 조선일보는 28년 신춘문예를 오픈했고 현재 전국 일간지 25곳이 신춘문예를 실시하고 있다. 문학세계사가 1990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한 당선시집. 중앙서관은 당선전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韓 '신춘문예 100년' 이근배 시인 '당선 5관왕'·60년부터 '영남일보 신춘문예' 공모
◆신춘문예 다관왕신춘문예 다관왕은 누굴까.1순위는 이근배 시인. 196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묘비명'이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에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벽'과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압록강'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등단했다. 1962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보신각종'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달맞이꽃'이 당선되었으며,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북위선'이 당선됨으로써 문단 최초 신춘문예 5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4관왕은 영남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문형렬 작가다. 그는 1975년 계성고 재학시절 매일신문에 동화가 당선된 것을 비롯하여 1982년 조선일보에 시, 같은 해 매일신문에 소설, 1984년 조선일보에 소설이 당선되는 등 신춘문예 4관왕을 차지한다.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우광훈은 영일문학상에서 소설, 다시 97년 경향신문에서 소설, 2011년 매일신문에서 시로 당선됐다. 지역 작가 중 중앙 일간지 당선자는 전상열(조선), 서종택(서울), 이동순(동아), 이진흥(중앙), 여정(동아), 변희수(경향), 천수호(조선), 박미란(조선), 김승혜(조선), 고명재(조선) 등이다.85년 동아일보 당선자인 기형도 시인은 29세에 요절함으로써 두고두고 신드롬의 주인공으로 각인된다.◆영남일보 신춘문예를 넘어서다영남일보는 60년부터 신춘문예를 시작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모 부문이다. 첫해는 일반인보다 초중고 학생백일장 같은 느낌이 든다. 국민학교부는 글짓기와 동요, 중·고교부는 산문과 시 부문으로 나눴다. 하지만 80년대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신춘문예는 사라지고 오랜 동면에 든다. 그리고 1991년 신춘문예를 일제잔재라 규정, 이름을 바꿔 영일문학상을 태동시킨다. 이 문학상은 2017년 영남일보문학상(현재는 영남일보 구상문학상과 병행)으로 거듭난다. 현재 신춘문예를 버리는 흐름도 녹록지 않다. 한겨레신문은 신춘문예 대신 '한겨레문학상', 중앙일보는 매년 9월에 '중앙 신인문학상'을 발표한다. 2014년 평화방송·평화신문도 신춘문예 공모를 폐지하고 대신 '신앙체험수기'로 대체했다. '문학적 작품성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가톨리시즘에 입각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과 확산이라는 대의가 다소 퇴색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역시 신춘문예 못지않게 문예지 등단이 대세였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등단의 축은 신춘문예 쪽으로 이동된다. 하지만 창작과 비평(1966년 출간), 문학과 지성(1970년), 이후 문학동네 등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점차 문예지에 힘이 실리고 아울러 80년대 초까지 존재했던 '추천제'(보통 3회 추천을 받아야 등단이 완성)도 소멸되며 대타로 등장한 문예지 신인상이 더 힘을 얻고 있다. 뉴스N제주는 2019년부터 국내 첫 신춘문예에 '디카시' 부문을 신설해 화제가 됐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영남일보는 1960년부터 신춘문예를 실시했다. 처음에는 학생백일장 같은 모습으로 출발했고 훗날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한동안 신춘문예가 사라진다. 이후 1991년 영일문학상, 재차 '영남일보문학상'으로 명칭이 바뀐다. 일제의 잔재인 신춘문예를 넘어서기 위해서였다. 1968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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