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사람] 신도환 신민당 총재

  • 입력 2002-04-25 00:00

자유당 정권 시절 국회의원에 당선, 정계에 입문한 후 1988년 은퇴하기
까지 우리나라 반세기 현대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신도환 전 신민
당 총재(80). 줄곧 대구에서 출마, 5선 의원을 역임한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한체육회장 서리, 대한반공청년단 총본부 단장을 거쳐 국회에 첫
진출했다. 이후 고대생 습격사건에 연루돼 5.16군사혁명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10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는 등 격랑에 휘말렸다. 일제하에 명치
대 법대 재학시절엔 유도명인으로 전 일본 유도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전 세계를 통털어 유도 10단 자격증을 지닌 유일한 사람이다.

효자로, 애처가로 알려진 그는 신민당 총재시절 돌연 정치계 은퇴를 선
언해 세간에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10여년간 정치문제에 입을 닫아 온 신
전 의원은 "'천하를 다 준다해도 의가 아니면 받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
을 후배 정치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며 말문을 열었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어서인지 그는 여든삿 나이에도 팔굽혀펴기 80회를 거뜬히 소화해 낼
정도로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다.

"(요즘 정치인들은) 한마디로 정치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시정잡
배 집단도 이보다는 나을 겁니다. 정당에서 당수의 말이 먹히지가 않으니
어찌 공당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당내 민주화라지만 당에서 결정
한 사항은 모두가 따라야 하고, 개인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로 그
쳐야 하지요. 모두가 잘났다며 나서서 이전 투구를 벌이는 모습이 안타까
워요."

신 전 의원은 "지금과 같은 정치판을 형성한데는 김영삼.김대중씨의 책
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당수와 대통령을 지낸 이들 정치인들이 신뢰를 주
지 못했고, 지금도 실망스런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

"마약과 정치는 죽을 때까지 끊을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한번 맛 들이
면 웬만한 결심으로 그만둘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렇지만 그는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음
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의성군 안계가 고향인 신 전 의원은 대구 달성국교와 계성학교를 졸업했
다. 13세에 유도에 입문해 계성학교 졸업시절 3단이었고, 일본 명치대에
입학한 20세에 특별승단을 거쳐 전 일본 최연소 5단 기록을 세웠다. 일본
유도전문지에선 '신도환 기술'을 특집으로 꾸밀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국내에 들어와 두번의 죽을 고비를 맞는다. 좌.우익
으로 나뉘어 싸움이 한창인때 계성학교 교사로 부임한 그는 도끼로 머리가
찍히고, 권총으로 관통상을 입는 테러를 당한다. 동산병원에서 만 4일만에
의식을 찾았다. 한국동란때 국민방위군 소령으로 입대, 참전한 그는 뒤늦
게 동경대 법학부와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국제법을 전공한다. 그는 1958년
마침내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그는 "두번에 걸쳐 효자상을 받은 것이 35세의 젊은 나이에 쟁
쟁한 정치선배들을 제치고 국회로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회상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던 그는 이후 대한체육회장 서리와
대한반공청년단 총본부 단장에 임명된다. 1960년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대생 습격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는 배후로 지목돼 5.16군사혁명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8년이 넘는 옥살이를 하게 된다.

"지금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대생 습격사건과 반공청년단과는 전
혀 무관합니다. 깡패들이 대학생을 습격해 피로 얼룩지게 한 사건인데 당
시 깡패 두목과 행동대원들이 입을 맞춰 배후로 저를 지목한 것입니다. 그
러나 결국 저의 무혐의가 입증돼 4.19혁명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지만, 5
,16혁명재판에서 군사정부가 자신들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법정구속해
사형까지 구형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석방된 이듬해인 1971년 신민당 당수인 유진산씨에게 발탁돼 8대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한다. 이후 9대, 10대 국회의원을 거치며 야
당 사무총장, 최고위원을 맡기도 했다. 85년 12대에 당선돼 88년 신민당의
마지막 총재를 역임했다.

"나는 총재가 된 다음 기자회견을 통해 김영삼씨건 김대중씨건 한 사람
만이 전야권을 대표해 대통령 후보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만약 이
여망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총재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을 당원과 국민에게
분명히 했습니다."

신 전 의원은 "김영삼씨의 대변인격인 김명륜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와
12년간 나의 비서관으로 있다가 김대중씨의 신당인 평화민주당으로 옮겨
간 한광옥씨를 불러 후보단일화문제를 논의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당초
약속대로 정계은퇴 기자회견을 했다"고 술회했다.

신 전 의원은 김영삼.김대중씨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김영삼은 야당
을 보따리째 싸가지고 여당에 들어갔으니... 나는 정치원로이기 이전에 너
무나 큰 배신감에 사로잡혀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은 그 화
려한 언변이 자기 스스로를 너무나 가볍고 국민과 야당 동지들이 믿지 못
할 정치인으로 여기게 만들고 말았다"(신도환 회고록 '천하를 준다해도'에
서)

신 전의원은 의(義)를 중요시하는 정치인이라고 주위 사람들은 말한다.
한광옥씨가 12년 그의 비서를 했고, 운전기사와의 인연은 50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그의 성품을 대변한다. 운전기사는 결혼전부터 시작, 70세를 넘긴
요즘도 신 전 의원의 차를 몰고 있다는 것.

대한체육회 고문, 대한체육인 동우회 회장, 헌정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
는 이 전의원은 "계성학교 제자들이나 거림낌없는 지인들을 만나 정치얘기
보다는 살아온 지난날들을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큰 즐거움중 하나
"라며 허허 웃었다.
/박윤규기자park353@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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