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야금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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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04  |  수정 2018-05-04 07:39  |  발행일 2018-05-04 제16면
천정락<대구시립극단 수석단원>
천정락<대구시립극단 수석단원>

대명공연거리에는 연습실과 소극장이 모여있다. 연습이나 공연을 위해 그 곳에 갈 때면 카페에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소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후배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볼 때면 내가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가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 시절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연습을 보며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어’라며 자만했고 의지도 불태웠다. 호흡법을 익히고 발성과 발음연습을 하면서도 나의 시선은 화려한 조명이 비춰지고 있는 무대에 가있었다. 그렇게 무대에 오를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날,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연습이 부족했고, 기본적인 연기술도 연마되지 않았고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 공연이 잘될 리가 없었다. 결국 공연 도중 막을 내려야 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준비하지 않고 급하게 당장 눈앞의 영광만 먹다가 심하게 ‘체한’ 것이다.

요즘 먹방, 즉 먹는 방송프로그램을 보면 출연자가 음식을 폭풍 흡입하면서 입이 터질 만큼 많은 양을 한꺼번에 삼킨다. 그러면서 먹은 양만큼의 찬사를 쏟아내며 너스레를 떤다. ‘저러다 체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생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폭식하면 체하게 된다.

체하는 건 비단 먹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산에 오를 때 젊은 혈기에 산행 시작부터 성큼성큼 급하게 올라가다보면 얼마 못 가 숨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쏟아져 내린다. 음식을 급하게 먹고 체한 것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산에 오르거나 마라톤을 할 때도 처음 20~30분은 몸이 적응할 수 있도록 천천히 걷거나 뛰어야 오래 갈 수 있다고 한다. 악기 다루는 일, 노래 등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 처음에는 몸을 푸는 워밍업을 하면서 조금씩 적응해 가야 된다는 것은 기본인 것이다. 공부하는 것도 기초부터 차근차근 해야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 나의 경험상 벼락치기로 급하게 공부해 좋은 결과를 얻어 본 적은 없었다.

탁구 레슨을 받을 때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이게 도움이 될까 의심하기도 하고, 공을 놓칠 때마다 “왜 이렇게 안 되지”라고 푸념하면, 코치는 작년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이 늘었다 하였다. 탁구에 필요한 기본동작을 꾸준히 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모든 일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당연한 진리를 탁구장을 나설 때마다 새삼 깨닫는다. 야금야금 천천히 하다보면 조금씩 변화된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천정락<대구시립극단 수석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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