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대구의 정체성 3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8-07-30  |  수정 2018-07-30 07:46  |  발행일 2018-07-30 제18면
[문화산책] 대구의 정체성 3
김상진<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대구가 독립운동의 성지란 사실을 아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열들을 기리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토요일인 지난 21일 수성구립 용학도서관이 진행한 ‘2018 길 위의 인문학’ 제2부 ‘대구정신과 독립운동’ 탐방 프로그램에 참가한 시민들은 하나같이 “대구가 애써 독립운동가들을 잊으려 했던 것으로 느껴진다. 미안하고 부끄러움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대구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대구지역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 나선 시민 40여 명은 가장 먼저 지난 5월 국립묘지로 승격된 신암선열공원을 찾았다. 독립운동가 52분의 위패가 모셔진 ‘단충사(丹忠祠)’와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서였는데, 단충사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바람에 계단 밑에서 묵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구시 인터넷 홈페이지에 소개되는 대구의 근대사는 국채보상운동, 조선국권회복단, 신간회 대구지회 등을 언급할 뿐 독립운동사에서 우뚝한 대한광복회나 박상진 총사령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또한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앞다퉈 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지만, 대구에서는 아직까지 계획조차 없는 실정이다.

대구는 청일전쟁 때부터 일본군이 주둔한 군사 요충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현재 남구 이천동 미군부대 자리에 주둔했으며, 동구 K2비행장도 1936년 건설됐다. 이처럼 일본군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독립운동을 벌이기에 위험 부담이 훨씬 더 컸지만 선열들은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특히 무장투쟁을 전개해 독립을 달성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국내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회가 1915년 7월7일 달성공원에서 결성됐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한광복회는 만주를 비롯해 조선 팔도에 지부를 두고 일제의 금광과 우편마차를 습격하거나 친일파 부자를 처단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웠고, 민족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되는 기반을 제공했으며, 1920년대 의열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는 등 독립운동사에서 우뚝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구의 독립운동은 1940년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다시금 불꽃을 피웠다. 1941년 대구사범학교 학생과 교사 등 300여 명이 체포된 ‘반딧불 사건’을 비롯해 1940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무우원 사건’, 1942년 대구상업학교 학생 26명이 조직한 ‘태극단 사건’, 1944년 ‘대구학병 탈출사건’ 등이 있다. 특히 무우원 조직원들은 법정에서 독립을 도모한 사실을 인정한 뒤 일제 법원에 상고하지 않고 광복 전에 모두 옥사하는 기백을 보였다. 김상진<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