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만진 소설가
1778년 5월30일 볼테르가 세상을 떠났다. 볼테르는 '샤를 12세의 역사'와 '루이 14세의 시대' 등의 역사서, '신앙 자유론'과 '철학 서간' 등의 철학서, 서사시 '라 앙리아드'와 소설 '캉디드' 등의 문학작품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역사가, 철학자, 시인, 소설가 중의 하나가 아니라 흔히 작가로 소개된다.
'작가' 칭호를 그릇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다. 볼테르를 작가로 보는 것은 그가 문학 작품'도' 창작했기 때문이다. 시나 소설은 쓰지 않고 역사서나 철학서만 집필하면 그는 역사가 또는 철학가이다. 즉 역사서도 철학서도 아닌 잡문'만' 쓰면서 작가를 자칭하면 안 된다.
글쓰기는 정교한 훈련을 거치면 누구든 능력자가 될 수 있다. 반면 창작은 예술행위인 탓에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일정 경지에 닿지 못한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폭포 속 동굴에 들어가 무수한 가창 연습 끝에 목으로 핏덩이를 쏟아내면 명창이 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무모를 실천하면 죽는다.
철학소설 '캉디드'의 주인공 캉디드는 '순박한 사람'을 뜻한다. 당연히 캉디드의 인생은 낙천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그의 삶은 혹독한 전제정치 하에서 처절하게 살다가 불과 3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푸시킨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에는 참으라/ 기쁜 날은 반드시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오늘은 항상 어두운 법/ 모든 것은 순간에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게 생각되리니'
다시 당연히, 캉디드는 도저히 낙천적일 수 없는 세상에 휩쓸려 난파당한다. 심지어 세상은 성직자조차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추악하다. 다시 심지어, 캉디드 본인도 가톨릭 종교재판소 판사를 죽이고 예수회 신부를 칼로 찌른 뒤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관주의에 빠져야 하는가? 사회를 진보와 개선이 불가능한 곳으로 보고 염세에 젖어야 하는가? '캉디드'는 결론 없이 끝난다. 왜냐하면 철학서가 아니라 소설이기 때문이다. 독자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이 볼테르의 창작 기법이다. 결론을 내리는 일은 캉디드의 권한에 속한다. 상당한 재산과 연금을 즐기며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 '농부'를 자칭하고, 잡문을 쓰는 사람이 명함에 '작가'를 새기고 다닌들 어쩔 것인가? 사회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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