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경용 금화복지재단 이사장·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
대구의 서쪽 끝, 한때는 정구지 밭이 펼쳐졌고, 1990년대까지는 섬유산업의 중심지로서 도시의 심장을 뛰게 했던 곳. 나 역시 그 시절, 섬유공장의 기계 소음 속에서 땀 흘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방직기의 진동, 밤늦도록 꺼지지 않던 공장의 불빛 속에서, 우리는 산업의 동력이자 대구 경제의 맥박이었다. 그러나 산업의 쇠퇴와 함께 이 지역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고, 개발의 흐름에서도 비켜나 있었다.
그런 이곳에 2021년, 새로운 문이 열렸다. 서대구역사. 누군가는 낯설다 했고, 누군가는 기다림 끝에 마주한 출발이라 반겼다. 고속철도와 광역철도가 교차하는 이 역은 단순한 교통의 거점이 아닌, 한때 소외되었던 지역이 다시 도시의 지도 위로 복귀하는 상징적 선언이었다. 서대구는 오랜 시간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곳이다. 공단의 기억, 좁은 골목의 정취, 작은 가게의 인사말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삶의 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지역이다. 그 시절 나는, 섬유공장 주변의 정구지 밭을 바라보며 종종 글을 쓰곤 했다. 지금은 복지재단을 운영하며 지역을 섬기고 있지만, 그 산업의 기억은 여전히 내 삶 깊은 곳에 살아 있다.
그리고 이제, 그 시간의 퇴적층 위로 조용한 흐름 하나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서대구역은 기다림을 품은 도시의 태도이자, 외면당하던 시간을 끌어안고 내일을 준비하는 품격 있는 선언이다. 역사의 외관은 독수리의 형상을 본떠 설계되었다. 그 날갯짓은 단지 조형미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랫동안 땅에 묶여 있던 지역이 다시 비상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의지, 그리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려는 도시의 자존을 상징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진정한 자유는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라 했다. 서대구역은 그 시작의 문이다. 기차는 앞으로 달려가지만, 역은 멈춰 선다. 그 멈춤은 누군가에게는 떠남의 출발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돌아올 수 있는 따뜻한 품이 된다. 지금 이곳에 선다는 것, 그 자체가 도시의 성찰이며 존재의 재확인이다. 이 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다. 과거를 지우지 않고, 멈춰 있던 시간을 품어 안는 용기의 문, 그리고 도시의 태도와 상상력을 시험하는 경계다.
그런 자세에서, 진정한 성장이 시작된다. 이제 서구는 산업의 기억 위에 새로운 일상을 뿌리내리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학교와 복지시설이 문을 열며 삶의 온기가 더해진다. 주변이 중심이 되는 시대, 서대구는 이제 대구의 내일을 새롭게 써내려가는 중요한 축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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