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각예술가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은 순간들을 그림에 담아왔다. 반복되는 일상의 익숙함 속에서 변함없이 마주할 수 있는 대상은 내 작업의 주된 소재가 되었다. 늘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산은 나에게 이상향과도 같은 존재였고, 매일 마주할 수 있는 주변 인물들은 산을 닮은 형상으로 내 그림 속에 남았다. 나에게 '볼 수 있음'은 곧 존재의 지속을 의미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내가 바라보던 것들도 자연스레 변해갔고,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나에게 '변하지 않는 것'은 왜 눈으로 마주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했을까? 나는 왜 볼 수 있어야만 지속되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제야 나는 '시각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품게 되었다.
그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재현하거나, 보이지 않는 상상의 이미지를 조형 요소를 통해 평면 위에 구현하는 일이다. 음악이 청각의 예술이고 연극과 영화가 시각과 청각의 결합을 통해 경험된다면, 미술은 무엇보다 '본다'라는 행위에서 출발하는 예술이다. 미술의 본질적인 측면은 바로 시각적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나 역시 시각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내가 바라본 것들에서 비롯된 생각과 감정을 이미지로 옮겨왔다. '볼 수 있음'에서부터 시작된 나의 그림은 이제 '볼 수 없음'을 마주하며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앞으로 내가 그림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새로운 지점이 되었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더 이상 시각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른 감각들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형태는 사라졌지만, 내 안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대상과 맞닿았던 촉각의 감각이었다. 체온과 압력, 무게와 온기처럼 서로 닿아 있던 순간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내게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나는 그 감각들을 시각적 언어로 옮기고자 하였다. 회화에서 말하는 '시각적 촉각성'은 눈으로 보면서 마치 만지는 듯한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인식의 방식이다. 나는 무언가를 품에 안은, 서로에게 기댄, 맞잡은 손처럼 포개어진 순간들을 반복해서 그렸다. 내가 기억하는 '맞닿음'에 대한 기록이었고, 나는 촉각의 경험을 시각을 통해 확장하고자 하였다.
나에게 남은 모양을 그리는 것은, 볼 수 없음에도 여전히 감각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을 거듭 떠올리는 일이다. 이제는 눈으로 마주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닌, 희미해진 모양 그대로 나는 나에게 남은 것들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화면 위에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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