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균의 ‘지방의 눈으로 AI읽기’] 송소고택의 튤립처럼

  • 유철균 경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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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5-11 08:07  |  수정 2026-05-12 08:59  |  발행일 2026-05-12
유철균 경북연구원장

유철균 경북연구원장

경북 청송 파천면 덕천마을은 청송 심씨 집성촌이다. 나지막한 산들과 맑은 하천이 어우러진 이 마을에 1880년경 송소 심호택이 지은 송소고택이 있다.


이 99칸 대저택은 위엄 있지만 정겹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가 아담한 담장들로 연결되어 있다. 5월이면 정원에 모란, 작약, 철쭉,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피고 오래된 회나무, 소나무, 전나무가 햇살을 받아 푸른 생기로 빛난다.


송소고택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별채다. 별채 중문 앞에는 시골 골목길을 바장이던 토종 강아지가 돌로 변한 것 같은, 귀여운 돌해태 두 마리가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진한 먹빛 기와를 얹은 지붕이 단정하게 앉아 있고 흙과 세월이 함께 쌓인 황토벽이 굵은 나무 기둥 사이를 채우고 있다.


문 앞에 서서 모래빛 마당, 초석, 디딤돌, 툇마루를 더듬어가면 문득 시선이 멈추는 곳은 마루 끝에서 후원으로 통하는 열린 문짝이다. 어둑한 실내 때문에 문짝 바깥, 햇살이 비치는 후원의 풀밭이 사각 액자처럼 빛난다.


하얀 냉이꽃이 만발한 풀밭, 연초록 병풍처럼 둘러싼 숲, 꽃과 나무와 햇살이 대화하는 그 풍경 속, 빨간 튤립 세 송이, 노란 튤립 두 송이가 피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사랑을 받아 번성했고 17세기엔 네델란드 튤립 광풍 속에 수천 가지 원예 품종으로 개발되었던 튤립. 그런 외래종 꽃이 송소고택의 수수한 풍경 속에서 마치 백 년도 넘게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한옥의 창호가 살아있는 액자가 되는, 한국적 차경(借景)의 걸작이다. 이 차경 앞에 서면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멀어지고 모든 움직임이 멈춘다. 여기에는 한국의 전통이 만드는 깊고 고즈넉한 정취. 마음의 티끌이 다 씻겨 나가는, 단아하고 충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경북연구원이 하는 AI 사업들도 부디 송소고택의 튤립 같기를 희망한다.


AI는 철저한 외래종 기술이다. '소버린 AI(자주적 AI)'라는 말은 정책적 의욕의 표현일뿐 한국 AI 기술의 실상은 아직 미약하다. 최근 아티피셜 애널리시스가 평가한 국가별 리딩 모델 순위에서 27개 모델 중 한국의 AI 모델은 25위의 솔라 프로 3(업스테이지)뿐이다. 미국, 중국은 물론이고 프랑스에게조차도 뒤진다.


경북연구원은 이런 외래종 기술을 가져와 경북 예천의 소박한 소읍에서 AI 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 3년간 국가유산청 사업을 수주해 8세기 서라벌의 도시 공간을 메타버스로 재현했고, 7편의 AI 영화를 만들어 9개의 영화제에서 최우수상, 금상, 아너러블 멘션상을 받았다. 세계 최대의 단편영화제인 LA 국제단편영화제의 공식 초청작이 되어 LA의 리걸 라이브 극장에서 유료 상영되는 영광도 얻었다.


이 과정에서 경북연구원은 고증을 거친 고대 신라 유물이 영상 안으로 정확하게 들어가는 99퍼센트 실사화 AI 영화에 도달했다. 기존의 AI 영화는 신라 시대로 가면 중국풍의 옷, 무기, 갑옷, 머리 장식, 모자, 장신구 등이 생성되고 영상의 해상도도 실사와 거리가 먼 문제가 있었다. 연구원은 최초로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경북연구원은 또 온라인에 공개되는 대통령의 국무회의 동영상 전편을 분석하여 그 결과를 프롬프팅하여 국회 홈페이지 '의안정보'의 '2026년 예산안'의 711개 첨부파일을 분석하고 다시 그 결과를 프롬프팅하여 나라장터의 발주 내용을 분석하는 정책 레이더 AI를 구축했다. 정책연구기관 가운데 최초로 만든 국무회의와 국가예산안의 100퍼센트 모니터링 시스템이다.


경북연구원은 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글로벌 방한객 대상 서사 중심의 AI 관광 오케스트레이션 플랫폼 기술개발 사업'을 수주했다. 이제는 AI가 사람들의 여행 계획을 짜주는 시대이다. 이 사업은 클로드 같은 글로벌 범용 AI가 한국 여행 계획을 짜기 위해 소형 전문가 AI, 즉 MOE(Mixture of Experts)를 소환할 때 그 MOE로 틈입해 들어가서 경북 방문을 추천하는 AI를 만드는 것이다.


이 밖에도 경북연구원은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쌓여 있는 경북 종가의 문중 문적을 AI의 자가 강화학습으로 자동 번역하는 연구 등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지방연구원의 적은 인원과 작은 GPU 자원으로 수행된다. 지금 우리 시골연구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AI 문명이 만드는 지방 부흥, 기술의 평준화를 말해준다.


AI 시대에는 글로벌 빅테크의 기술적 비전이 거의 실시간으로 작은 국가의 외진 지방으로 전용된다. 지역의 소규모 행위자는 빅테크의 대규모 모델을 자기 형편에 맞게 모방한다. 빅테크는 광대한 환경 때문에 기술의 실효성을 입증하는데 어려움을 겪지만 지역의 소규모 행위자는 비전을 적용하는 맥락이 단순하기 때문에 높은 확률로 실효성을 입증한다.


1269년 2월14일 파스파 문자를 제국의 공식 문자로 선포했을 때 쿠빌라이 칸은 한반도의 108배에 달하는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한자와 위구르 문자는 이 광대한 영토의 710여 개 언어로 표출되는 행정 수요를 처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모든 민족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단일 알파벳, 파스파 문자를 창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자는 원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446년 9월29일 세종 이도는 파스파 문자의 조형 원칙과 음운학을 계승한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일부 티베트 문자의 자형을 채택했던 파스파 문자를 넘어 처음부터 발성 기관의 모양과 천지인 삼재(三才)라는 기하학적 원리를 철저히 밀고 나갔다. 그 결과 쿠빌라이 칸의 108분의 1 정도 되는 지역의 소규모 행위자가 만든 이 문자는 한민족이라는 민족 공동체의 강력한 중핵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자질문자로 살아남았다.


AI 활용화 사업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지방의 AI 사업들이 많이 살아남아서 송소고택의 튤립처럼 아름답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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