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108년 전 떠난 국보, 제자리에…김천 갈항사지 발굴 착수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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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8-08 18:05  |  수정 2026-08-10 13:54  |  발행일 2026-08-08
통일신라 유일 건립 경위 밝혀진 동·서 삼층석탑
부지 매입 및 3차 시굴·1차 정밀발굴조사 진행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왼쪽이 동탑(높이 4.3m)이고 오른쪽이 서탑(높이 4.3m)이다.<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왼쪽이 동탑(높이 4.3m)이고 오른쪽이 서탑(높이 4.3m)이다.<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경북 김천시 남면 금오산은 김천의 상징인 삼산이수(三山二水)를 이루는 산 가운데 하나다. 폭염을 피해 이른 오전 금오산 서쪽 자락의 갈항사지를 찾았지만, 뙤약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수백 년 전 형체조차 사라진 천년고찰 갈항사(葛項寺)가 주목받고 있다. 오랜 세월 절터에 남아 무너진 절을 지키다가 조선총독부박물관(경복궁)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 정원에 서 있는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의 귀환을 위한 발굴조사 등 사전 절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갈항사는 당나라에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통일신라 승려 승전에 의해 692년(효소왕 1년) 화엄종 사찰로 창건됐다. 삼국유사는 "승전이 개령군(당시 지명)에 절을 짓고 돌멩이 80개를 모아놓고 화엄경을 강연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화엄종이 신흥종파인 까닭에 신도가 모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에서 등장한 게 '돌멩이를 향한 화엄경 강연'이 아닌가 한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당시 화엄종은 비주류로서, 승전이 돌멩이를 두고 한 강연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한 특별 이벤트로 볼 수도 있다"며 "이러한 강연의 효과인지 그 후론 신도가 모여드는 등 사찰 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시굴 조사 및 정밀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인 갈항사지 전경.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시굴 조사 및 정밀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인 갈항사지 전경.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갈항사의 전성기는 김천시가 되찾아오려는 '동·서 삼층석탑'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갈항사는 신라 38대 원성왕(김경신:재위 785~798)이 보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의 외삼촌 언적(승려), 어머니 박씨(소문왕태후), 박씨 동생 등 원성왕 외가와 돈독한 관계였고, 삼층석탑은 이들 3인의 발원으로 758년 세워졌다. 원성왕은 잘 알려진 '즉위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 선덕왕 뒤를 이을 왕으로 추대된 김주원은 즉위식날, 때마침 물이 불어난 북천(알천)을 건너지 못해 왕궁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 사이에 권력의 추는 김경신으로 기울어져 등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갈항사의 가치를 대변하는 대표적 유물은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이다. 두 탑은 균형 잡힌 비율과 정교한 조각기법이 돋보이는 등 통일신라 석탑의 정수로 평가된다. 특히 이 탑의 결정적인 가치는 동탑 기단부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있다. 송 국장은 "이두문의 명문은 '두 탑은 천보(당나라 현종 연호) 17년 경신대왕(원성왕)의 어머니 소문왕태후와 여동생, 오라비 언적 등 3인의 발원으로 세워졌다'고 알리고 있다"며 "우리나라의 수많은 탑 가운데 조성연대와 건립 경위가 밝혀진 유일한 사례"라고 했다. 그는 "명문은 원성왕 즉위 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이 탑은 김천에 신라왕실의 지원을 받는 원찰(願刹)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갈항사는 금오산 약사암과 북삼 굴암사 등을 산내암자로 거느릴 정도의 대찰이었지만, 임진왜란 와중인 1592년쯤 전란을 입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이 서 있던 자리를 지키는 표지석. 오른쪽은 동탑, 왼쪽은 서탑 자리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이 서 있던 자리를 지키는 표지석. 오른쪽은 동탑, 왼쪽은 서탑 자리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화엄종대가람 갈항사는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동·서 삼층석탑은 그 자리를 지키며 천년을 버텨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6년, 전국의 주요 문화재 파악에 나선 조선총독부의 관심은 이들 탑에까지 미친다. 명분은 도굴 예방이었고, 실제 일본인 도굴꾼들에 의해 동탑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지만, 석탑의 학술적·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동탑은 1916년, 서탑은 1921년 각각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이운된 이후 한 세기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한편 도굴꾼이 일본으로 밀반출하려고 인천 부두까지 옮겼지만, 여의치 못해 방치된 상태에서 191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가게 됐다는 설도 있다.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귀환을 위한 노력은 향토사학계 등에 의해 일찍부터 시작됐다. 이들은 환지본처(還至本處:본래의 자리로 돌아감)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최근 학계 및 시민사회의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화유산은 원래 세워졌던 역사적·지리적 맥락 속에 존재할 때 가장 완벽한 가치와 생명력을 발휘한다는 원칙이다. 그동안의 중앙집중식 보존 방식은 지역의 박탈감을 부추겼고, 문화재 본래의 장소성(Placefulness)을 훼손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등 관계 기관에서도 문화재의 안전한 보존 환경과 지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 체계가 갖춰진다면, 원위치 봉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전향적 자세를 보였다. 갈항사지 삼층석탑의 귀환에 청신호가 켜진 것이다.


보호각에 보존된 갈항사 석조석가여래좌상.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보호각에 보존된 갈항사 석조석가여래좌상.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지금까지 환지본처 사례는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에 반출됐던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은 112년 만인 지난 2024년 원주로 돌아갔다. 원주시는 유적전시관 건립 등 철저한 사전 인프라 구축을 통해 중앙정부의 반환 승인을 이끌어냈다. 김천시도 갈항사지 발굴과 사적 지정 추진을 넘어, 귀환할 석탑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보존시설과 안전관리 체계 등 하드웨어적 요건을 선제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환수의 핵심 열쇠가 될 전망이다.


김천시는 민간 소유의 농지인 갈항사지 11필지 가운데 9필지(1만2천140㎡)를 매입해 두 차례 시굴조사를 벌이는 등 일찌감치 동·서 삼층석탑을 맞을 준비에 돌입했다. 현재는 '갈항사지 3차 시굴조사 및 1차 정밀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올 연말까지 조사 범위를 확정하는 등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발굴에 나선다. 시는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국가유산청에 사적(史蹟) 지정을 신청할 방침이다. 배낙호 김천시장은 갈항사지 삼층석탑을 반환받기 위한 노력은 단순히 문화재 하나를 반환받기 위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우리 김천의 역사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탑에 밴 천년의 숨결을 시의 미래 가치로 환원하는 역사적 과업"이라고 정의했다.


갈항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금오산을 등지고 보호용 철창 속에 있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갈항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금오산을 등지고 보호용 철창 속에 있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한편 조명숙 김천시의원은 "현재 삼층석탑을 반환받기 위한 김천시의 추진계획은 비교적 구체적"이라며 "반면 돌아온 탑을 어떻게 운영하고, 어떤 문화콘텐츠를 만들며, 지역의 다른 문화유산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는 충분치 않다"고 봤다. 이어 "문화유산은 시민이 찾고 배우고 활용할 때 비로소 지역의 자산이 되는 만큼, 이 탑을 김천의 역사문화자원과 어떻게 연결하고, 교육과 관광, 연구, 시민참여 등의 문제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길 기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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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김천의 오늘과 김천 사람들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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