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혁신의 대경인 .7]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총장

  • 입력 2006-11-16   |  발행일 2006-11-16 제22면   |  수정 2006-11-16
세계적 工大 육성 '포항의 기적' 이뤄내
[창조와 혁신의 대경인 .7]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총장
1985년 8월 포항공대 착공식에서 박태준 학교설립 이사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김호길 총장(왼쪽).

1994년 4월. 잔인한 그달의 마지막 날인 30일 포항시 남구 효자동 포항공대(포스텍) 교정에서는 학내행사 친선 체육대회가 열렸다. 김호길(金浩吉) 총장은 그 어느 때보다 고무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며칠 전 포철 고위층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포항공대로서는 포항제철(포스코·POSCO)로부터의 대학법인 분리 문제가 최대 현안이었다. 그런데 분리와 함께 일시에 거액의 재단지원금을 받기로 약속받았던 것. 일반경기 후 김 총장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참가하는 발야구가 이어졌다. 발을 쭉 뻗어 공을 차고 1·2·3루를 거쳐 단숨에 홈으로 뛰어 들어오던 김 총장은 가속도가 붙은 몸을 조절하지 못해 홈 바로 뒤편 콘크리트 벽에 그만 머리를 부딪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열기로 넘쳤던 운동장은 일순간 정막에 싸였다. 구급차로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출혈로 끝내 숨을 거둔다. 아직은 할 일이 많은 향년 61세였다. 세계적 물리학자이자 한국 과학기술계 거목의 최후로는 너무나 허무했다. 포항공대를 방문한 기자는 취재에 앞서 문제의 그 운동장을 찾았다. 옆에는 영빈관인 국제관 공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옹벽은 온데간데 없다. 학교 관계자는 사고 후에 모두 철거하고 철조망으로 대신했다고 귀띔했다.


핵물리학 분야 국제적 거물

박태준 회장 부탁받고 개교 준비 매진

실력있는 교수 영입위해 유럽 누벼

"인재육성 거스르면 민족의 역적" 설득

교수 33명 확보 87년 첫 입학식

1400억짜리 방사광가속기도 마련

#박태준과의 만남, '전권을 달라'

85년 5월 포철 영빈관. 박태준 포철회장은 미국에서 귀국한 뒤 연암공대 학장을 맡고 있던 김호길 부부를 초청했다. 삼고초려의 만남이었다. 박 회장은 설립될 포항공대의 초대 총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한다. 김 총장은 조건을 내걸었다.

"만약 제가 온다면 포항제철 부설 포항공대가 아니라 포항공대 부설 포항제철이 될텐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대학운영의 전권을 주고, '방사광가속기'를 설치해주십시오."

박 회장은 긍정적으로 대답했지만, 방사광가속기는 처음 듣는 용어였다. 중요성을 간파한 그는 김 총장에게 이를 약속한다.

총장 영입이 확정되자 김호길은 곧 미국과 유럽으로 날아갔다. 대학과 연구기관들을 샅샅이 뒤졌다. 개교를 앞두고 실력있는 교수들을 영입하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 22개국에서 450여명을 만났다. 귀국을 머뭇거리던 한국인 학자들에게는 "포항공대 창설에 동참하지 않으면 민족의 역적이 될 것"이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각고의 노력끝에 누가 포항에 오겠느냐는 기우를 깨고 창립교수 요원 33명이 포항땅을 밟고, 87년 3월 첫 입학식을 갖는다.

#한글학교와 교육혁신

62년부터 83년까지 20여년간 영국과 미국에서 세계적 물리학자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의 학문 천착 못지않게 교육 그 자체에 관심을 쏟는다. 미 워싱턴 DC의 메릴랜드대 교수로 재직할 때 교포 2세들이 우리말을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문교부와 주미 한국대사관에 거듭 요청한 끝에 70년 워싱턴에 한글학교를 세운다. 그의 논리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선진국가로 발돋움하려면 해외의 숱한 인재들을 유치해야 하는데, 이들이 한국말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활용할 수 있고, 또 그 책임은 누가 지느냐'였다.

포항공대 설립 당시 서울대를 뛰어넘는 세계적 공과대학을 육성하겠다는 목표에 학계에서는 반신반의했다. 서울도 아닌 포항에 그것도 기업이 만드는 학교가 단기간에 그렇게 도약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였다. 그런 우려는 처음부터 불식됐다. 종전에 경험하지 못한 다른 차원의 대학시스템이 포항공대에 접목됐다. 김호길의 혁신과 창의가 보태진 탓이다.

김 총장은 포항공대의 입시일을 서울대와 달리했다. 한날 한시에 입시일이 몰림에 따라 고득점 재수생이 양산되는 현실은 본인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낭비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 전국을 돌며 학생 모집을 독려했다. 앞으로 과학자가 돼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면 포항공대로 오고, 동문과 학맥으로 출세에 관심이 있다면 서울대로 가라고 말했다.

완공을 몇 개월 앞두고 타계해 아쉬움을 더했지만 방사광가속기도 그의 혁신적 의욕에서 비롯됐다. 88년 무려 1천400억원이 투입될 이 프로젝트가 발표되자 학계에서조차 무리한 사업이라며 말들이 많았다. 김호길은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런 쓰라린 경험이 있어야만 한국의 과학기술이 한 차원 더 발전할 수 있다며 밀어붙였다. 외국학자들의 실패 경고에도 불구, 국내 학자들이 직접 설계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세계 5번째의 방사광가속기를 가진 데 대해 지금 시비를 거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흔히 포항의 세 가지 기적으로 꼽는 포스코, 포항공대, 포항 방사광가속기 가운데 그는 두 가지를 이뤘다.

김 총장으로부터 스카우트돼 포항공대로 온 장수영 전 포항공대 총장은 "그는 스케일이 크고 전체 밑그림을 잘 그리는 스타일"이라며 "세계적 석학이자 포항공대의 틀과 방향을 확실히 잡아준 탁월한 대학행정가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물리학과 유학

국제원자력기구(IAEA) 후원으로 영국에 유학한 그는 2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버밍엄대 개교 이래 최단 기간의 박사학위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입자 가속기의 실험물리학을 바탕으로 차츰 핵물리학의 실험과 이론, 플라스마 물리학으로 연구분야를 다양화하며 명성을 높여간다. 원자핵 파괴장치인 사이클로트론(Cyclotron)연구에 참여하고, 입자가속을 위한 '킴스 코일-Kim's Coil'을 창안, 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포항공대 도서관은 그의 호를 딴 무은재(無垠齋)기념도서관이다. 맞은편 건물 1층에는 무은재추모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김 총장이 신조처럼 말했다는 '자연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지요'란 글귀가 방문객을 맞는 이곳은 그의 유학시절 유품에서부터 사진과 책자 등이 전시돼 있다. 이 가운데 한 켠에 축소 재현해 놓은 그의 총장 집무실이 인상적이다. 벽에는 그가 존경했다는 아인슈타인의 사진이 걸려 있고, 책상위에는 물리학 서적과 함께 퇴계문집이 쌓여 있다. 그는 늘 퇴계문집을 가까이 했다.

고전을 탐독하고 한시에도 능했던 그는 87년 박약회를 설립, 유학의 근대화 운동을 선도한다. 어린 시절 안동에서 이황 후손이자 유학자인 고모부로부터 유학을 사사한 영향이 컸다. 과학 중의 과학인 물리학을 하면서도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은 셈이다.

신도 배제한 과학을 믿은 그였지만, 도(道)와 덕(德)의 가치관은 그를 이끈 또하나의 원천이다. 퇴계 이황이 한양이 아닌 안동에 도산서원을 설립해 조선 인재를 양성했듯이, 김호길은 서울 아닌 포항에 현대판 도산서원 포항공대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동기획=경북도, 대구경북연구원

▨자료제공=김규영(포스텍 교수·김호길 기념사업회 실무위원장)

[창조와 혁신의 대경인 .7]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총장
[창조와 혁신의 대경인 .7]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총장
94년 4월30일 교내 운동장에서 열린 체육대회에서 발야구를 하고 있는 김호길 총장. 그의 마지막 순간이다.
[창조와 혁신의 대경인 .7]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총장
86년 5월 방한한 대처 영국총리가 개교를 앞둔 포항공대를 방문했다. 옆에 있던 김호길 총장이 뭔가 설명하고 있다.
[창조와 혁신의 대경인 .7]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총장
영국 버밍엄대 유학시절 동료들과 함께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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