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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으로 16년간 투병하던 원로 작곡가 박춘석씨가 14일 오전 6시 별세했다. 향년 80세. 빈소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네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치기 시작하며 '신동' 소리를 들었던 그는 1949년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 1년간 다니다 중퇴하고 이듬해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 길옥윤 등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 서면서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54년 '황혼의 엘레지'(노래 백일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다.
가수 이미자와의 만남은 그의 음악 세계에 큰 변화를 몰고 온다. 1964년 이미자와 콤비시대가 개막되면서 작풍이 트로트로 급선회한 것. 이미자와는 그동안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등 500여곡을 통해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작곡가 박춘석의 이름 뒤에는 항상 '사단(師團)'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60~70년대 패티김, 이미자,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가 박춘석 사단의 멤버였다.
고인은 이들과 함께 '가슴 아프게' '공항의 이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비내리는 호남선' '초우' '물레방아 도는데' '사랑이 메아리칠 때' '바닷가에서' '가시나무새' '마포종점' 등 한국인의 가슴을 적신 숱한 명곡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노래는 대중음악의 예술적 가치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50~80년대 한국 가요계를 이끌어온 그는 국내 대중가요 개인 최다인 2천700여 곡을 작곡했고,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천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2001년에는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그도 1994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모습을 감췄다. 16년간 투병하면서 거동은 물론, 언어장애로 의사표현도 하지 못했다. 고인은 '음악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래서 간병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동생 박금석씨(77)가 맡았다. 발인은 18일 오전 8시.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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