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18> 김정현의 '아나키스트 박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문경)'

  • 입력 2011-10-12   |  발행일 2011-10-12 제7면   |  수정 2021-05-29 20:07
20111012
박열(오른쪽)과 그의 일본인 아내 금자문자.

 

Story Memo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朴烈)은 18세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흑도회’와 ‘흑우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었다. 1923년 일본 국왕을 폭살하려고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총 21회에 걸쳐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박열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고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특히 그는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 취급을 하지 말 것,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를 사용할 것 등 네가지 조건을 요구하기도 했다. 22년 2개월이라는 장기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조국이 해방된 이후 신조선건설동맹에 이어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을 맡았다. 49년 영구 귀국했다가 6·25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납북됐다.

박열의 일본인 아내 금자문자(金子文子)는 22년 도쿄에서 박열과 운명적으로 만나 ‘사상의 동지, 사랑의 동거자’가 됐다. 무정부주의 운동도 함께하다가 23년 박열과 함께 일왕 암살모의 혐의로 체포돼 원하는 대로 사형이 선고됐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하지만 “부디 우리를 단두대에 세워달라. 나는 박열과 함께 죽을 것”이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일왕의 은사장을 찢어버렸다. 26년 우츠노미아 형무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짧지만 불꽃같은 삶이었다. 영남일보의 아나키스트 박열 스토리는 박열과 그의 일본인 아내 금자문자의 사형선고 직전 재판정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1926년 3월25일, 동경대심원(東京大審院) 대법정.

재판장 목야겸지조(牧野兼之助)는 자신의 뒤를 이어, 피고인석에 앉은 불령선인수(不逞鮮人囚) 박열(朴烈)과 그의 아내 일본인 금자문자(金子文子)를 착잡한 낯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1922년 일본 왕세자 결혼식을 기해 일왕과 왕세자를 일거에 폭살코자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폭탄을 입수하려고 기도한 혐의가 발각되어 대역죄로 기소된 터였다.

그들의 대면은 구속되고 4년만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형이 선고될 것이 불 보듯 뻔한 마지막 법정에 나란히 서게 된 두 사람은 지금 너무도 태연자약했다.

먼저 법정에 들어선 금자문자는 흰 저고리, 검은 치마 차림에 머리까지 조선여자처럼 쪽진 모습이었다. 이어 들어선 박열은 사모관대에 조선 관리의 예복인 조복(朝服)을 차려입고 사선(紗扇)으로 슬쩍 얼굴을 가리며 웃음을 지어, 반갑게 자신을 맞는 아내에게 화답했다. 삶과 죽음 따위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는 듯한 그 초연함이라니….

일본의 대법정에서, 그것도 대역죄를 지은 피고인들이 조선 복장을 한 것도 그랬지만 그들 둘은 지난 3월23일 옥중에서 정식으로 혼인신고서를 제출하여 합법적인 혼인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에는 까닭이 있었다. 박열은 이미 1923년의 예심(豫審) 법정에서, ‘①나는 피고가 아니라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조선주권을 강탈한 일본대표와 담판하는 위치에 있다. ②좌석은 재판장과 대등한 높이의 좌석으로 한다. ③나는 조선예복으로 정장하고 조선국어를 사용한다. ④재판 전에는 조선민족 대표로서 선언문을 낭독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관철한 때문이었다.

사법부로서는 치욕적이었지만 ‘우등국가’ 일본 법정에서의 정상적인 재판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피고의 협조를 얻어야 했고, 무엇보다도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지조와 기백에 머리숙이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이로써 재판장은 박열에게 ‘피고’가 아닌 ‘그 편’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박열은 재판장에게 ‘그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검찰은 이미 두 사람에게 사형을 구형해둔 터였다. 목야 재판장이 먼저 금자문자를 향해 무거운 입을 열었다.

“가네코 후미코. 그 편은 1903년 일본에서 태어나 부모와 사회로부터 친애 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다. 마침내 무정부주의자인 박열을 사랑하며, 대역죄를 짓게 된 것으로 검찰은 논고했다. 최후진술의 기회를 주겠다.”

금자문자는 힐끗 간수 몇 사람 건너 앉아있는 박열을 돌아보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먼저 나는 가네코 후미코가 아닌 조선인 금자문자임을 밝혀둔다. 내 비록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것은 사실이지만, 박열을 사랑한 것은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혹시 박열이 지은 ‘개새끼’라는 시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이것이 전문이다. 나는 그 시를 읽고, 그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임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음을 알았기에 우리의 사랑은 숙명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일에 동참하여, 그와 함께 이 법정에 선 일에 대해 추호의 후회도 없다.”

시 ‘개새끼’는 1922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조선청년’이라는 잡지에 박열이 기고한 것이었다. 금자문자의 당당한 진술에 법정이 술렁이자, 재판장은 얼른 박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편은 최후진술을 하시오.”

이번에는 박열이 몇 사람 간수를 건너 옆에 앉아 있는 금자문자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멸하라! 모든 것을 멸하라! 불을 붙여라! 폭탄을 날려라! 독을 퍼트려라! 기요틴을 설치하라! 정부에, 의회에, 감옥에, 공장에, 인간시장에, 사원에, 교회에, 학교에, 마을에, 거리에.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 의해 더렵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1924년 옥중에서 쓴 ‘나의 선언’이며, 그것은 곧 나의 사상이다. 나는 처음에는 민족적 독립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뒤 광의의 사회주의를 공부하며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고, 이제는 허무주의의 사상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여전히 민족 독립사상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니 나의 거사 계획은 민족의 독립투쟁이었다. 즉 조선 민중에 대한 실권자로 생각하며, 증오의 과녁으로 삼고 있는 일본 왕실을 쓰러뜨려 혁명적 독립적 열정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에는 일본 민중을 위하는 뜻도 있었다. 일본 민중에 대해서는, 일본 왕실이 일본 민중의 고혈을 착취하는 권력자의 간판이며, 일본 왕실은 신이 아니라 유령과 같은 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밝혀주려는 뜻이었다.”

법정이 더욱 술렁거렸다. 진술을 마친 박열은 태연하게 다시 의자에 앉았고, 목야 재판장은 이마에서 배어나오는 땀을 그대로 둔 채 잠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차마 그리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입안에 침이 고이기를 기다린 그가 고인 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은 뒤 입술을 뗐다.

“내가 이번 사건에 관계하면서 느낀 점은 주위환경이 사람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입니다. 박열은 그의 나이 여덟살 때 일·한합방이 되었기에 그 머리에 큰 원한이 깊이 뿌리박혀 허무사상을 가지게 된 모양입니다. 박열 부부의 죄를 말하자면 일본 사람으로서는 말로 할 수 없는 큰 죄이지만, 경우를 바꾸어서 생각하자면 박열만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사람으로서 박열은 두뇌가 명석한 재자(才子)니 사회적으로 유익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금자문자 역시 비슷한 환경에 유사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그리하여 친근하게 된 모양입니다.”

목야 재판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두 눈을 감았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이었고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일본국 대심원의 재판장이었고, 이제 최후의 선고를 해야 했다. 힘겹게 마음을 가다듬은 그가 눈을 떴다.

“1902년 3월12일, 조선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속칭 샘골 93번지에서 부(父) 함양박씨 지수와 모(母) 정선동씨의 3남1녀 중 막내로 출생한 박열. 그의 처 금자문자…사형에 처한다!”

일순 재판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에 잠겼다. 그러나 박열은 태연한 얼굴에 오히려 웃음까지 머금은 채 먼저 재판장 목야를 바라봤다.

“그대, 수고하였네.”

너무도 담담하고 당당한 그의 반응에 목야 재판장은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박열은 다시 고개를 돌려 금자문자를 향했다. 그녀 역시 태연한 낯빛으로 사랑하는 이의 눈길을 마주하며 두 손을 번쩍 머리 위로 추켜올렸다.

“조선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

박열과 금자문자, 두 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만세 삼창이 일본국 대심원의 법정에 쩡쩡하게 울려 퍼졌다.



열은 15세가 되던 1916년, 문경군 소재 함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그간의 교육이 일제의 압력에 의한 거짓교육이었다는 조선인 선생의 사과를 듣고 민족의식과 반일감정에 눈을 떴다. 이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3·1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한 뒤 도일(渡日), 와세다 및 메이지대학 교외생(校外生)으로 고학했다. 이때 조선 청년들과 함께 ‘흑도(黑濤)’ ‘현사회(現社會)’ 등의 불령 잡지를 발행하며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후 ‘태선인(太鮮人)’을 발간하며 일왕과 왕세자를 일거에 폭살하려던 음모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과 맞물리며 발각되어 1926년 3월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1주일만에 특별 감형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박열이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은 실로 컸다. 재판과정에서 그에 감복되어 대심원 재판장으로서 특별한 발언을 했던 목야는 결국 그로 인해 직을 내놓아야 했다. 예심재판 과정 중 그의 기개와 지조에 감복한 예심판사 입송(立松)의 배려로 처 금자문자와 정겨운 모습의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판결 확정 후 사진이 신문지상에 보도되며 대역죄인에 대한 우대가 정국을 뒤흔들어 내각이 붕괴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부부의 변호를 맡았던 후세다쓰시(布施辰治) 인권 변호사의 양심적 활약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옥중생활 중 혹독한 감시자 노릇을 했던 형무소 문서주임 후지시다이사보로(藤下伊一郞)는 해방 후 박열의 석방환영회 석상에서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해군비행사로 재직하고 있던 3남 창(昌)을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하여 박열의 아들로 삼게 해 사죄했다.

1926년 4월6일, 시곡(市谷)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금자문자는 돌연 교살(絞殺)된 사체로 발견됐다. 일본 행형당국은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형 박정식에 의해 인수된 그녀의 시신은 지금도 문경시 소재 박열 의사(義士)의 생가 인근에 안장되어 님을 기다리고 있지만, 아쉽게도 의사의 주검은 지금 북한 애국선열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겹치는 병마와 외로운 수감생활을 기어이 버텨내고 광복을 맞아 석방된 뒤 한동안 일본에 머물며 거류민단장 등을 맡아 활동하던 그는 1949년 4월1일 귀국하여 장학사업에 매진했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의 와중에 납북된 까닭이다.

사람을 사랑했던 아나키스트, 민족을 사랑했던 독립운동가, 일본인마저 감화되어 목숨으로 사랑하게 한 시대의 거인, 그가 박열 의사다.

공동 기획 : pride GyeongBuk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20111012
동경대심원(東京大審院) 대법정에 선 박열과 그의 일본인 아내 금자문자. 두 사람은 일왕과 왕세자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1926년 4월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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