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 대원군의 별장이었다가 한식당으로 변한 종로구 홍지동의 ‘석파랑’. |
KTX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지방사람들은 식사 때가 되면 다들 고민을 한다.
20여만곳에 육박한다는 서울권 식당. 어느 것이 암 까마귀이고 어느 게 수 까마귀인지 분간이 안갈 때가 많다. 같은 돈을 내고라도 푸짐하고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기분이 드는 해묵은 식당 정보는 서울권 비즈니스를 하는데 적잖게 도움이 될 듯해서 이번에 개괄적으로나마 정리해본다.
사실 서울역 앞, 강남터미널 앞 식당가는 솔직히 기대 할 바가 못 된다. 서울의 식객을 찾았다. 서울의 유명 블로거와 식당주인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는 서울 최고급 식객이 있다. 바로 황광해씨다. 설렁탕 유래를 밝히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다 뒤질 정도로 프로 근성이 남다른 50대 사내다. 네이버 카페 ‘포크와 젓가락(cafe.naver.com/foodk)’의 매니저로 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기획한 책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오래된 맛집 111곳’은 그가 지난 30년간 서울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제주 앞 바다에 숨은 전복 같은 식당들을 족보처럼 정리한 것이다.
개성음식 간 심심해 지방인 입엔 안 맞아
‘용수산’은 외국진출
밀실정치 1번지 ‘장원’ 은 호남한식 1호
4명 돼야 예약받아
굴비는 ‘굴비마을’ 홍어는 ‘옥주식당’
낙지는 ‘신안촌’ 유명
배용준 덕 본‘청담골’ 일본 아줌마들 순례
평북식 식당 ‘선천’은 문화예술인들 발길
‘석파랑’‘필경재’등은 건물 자체가 문화재
퓨전 한정식으로 1인분 최고 20만원대
◆ 서울 속 개성 음식점
일단 가장 서울권 음식에 가까운 개성음식 전문점은 챙겨두자.
서울 속 개성음식 전문점은 3곳(용수산·석란·마리)이 대표격이다. 1980년에 생긴 용수산(02-739-5599)은 종로구 삼청동에서 시작한 뒤 체인화에 성공했다. 삼청동, 청담동, 석촌호수, 비원, 목동, 서초동에 이어, 외국에까지 진출했다. 용수산은 개성에 있는 산 이름.
세 집은 점심 정식이 평균 3만2천원(1인분) 이상이며, 저녁은 최소 3만8천원 이상. 워낙 간이 심심해서 간이 센 지역민들에게 개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 서울 속 호남식당
4명은 돼야 예약을 받는다는 서울 상경 호남한식 1호는 장원(종로구 계동 104-1·743-3283)이다. 58년 청진동에서 문을 연 장원은 ‘한국 밀실정치 1번지’로 명성을 날렸다.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이병철, 정주영 등 당대 정·재계 인사들이 들락거렸다. 여주인 주정순씨는 목포의 육만석꾼 집안 출신이다. 나중에는 한정식으로 변했지만 초창기에는 요정이었다.
장원은 서울에서 ‘호남 한식의 조리사 사관학교’ 노릇도 한다. 2004년 딸 문수영씨가 가업을 이어받았으며, 2010년 1월 계동 현대사옥 왼쪽 골목에서 새로 문을 열었다. 점심은 2만5천원부터 7만5천원, 저녁은 5만5천원 이상.
해묵은 호남식당을 강남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답은 ‘있다’이다. 강남 역삼역 부근의 옥주식당(역삼동 719-20·567-4009), 학동네거리 부근 굴비마을,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안의 군둥이네(강남구 신사동 657-29), 청담동 청담골(청담2동 19-17·3443-1252) 등이 있다.
군둥이네는 식당 입구에 아예 호남식당임을 표기해놨다. 전남 강진군 군동면 용소리 신기동(일명 메기마을)이라고 써붙였다. 입구 좌우측에 된장명가, 된장예술이라는 문구도 눈길을 끈다. 참고로 남도 한정식 1번지는 전북 전주가 아니라 전남 강진이다. 물론 이 말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집필 당시 그가 강진 해태식당을 자주 애용하면서 나온 말이다.
학동네거리 시네시티극장 뒤편 골목에 있는 굴비마을은 강남에서 굴비를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조기와 굴비는 어떻게 다를까. 조기를 장기 염장해 만든 게 바로 굴비다. 밤에는 3층에서 한상에 7만원부터 12만원대의 한정식을 낸다. 1만원대 이하의 고등어 조림과 구이도 괜찮다.
옥주(沃州)는 전남 진도의 옛 이름이다. 현재 진도경찰서 자리에 옥주관이란 객사가 있었다. 옥주식당에는 홍어 전문가가 따로 있다.
청담골은 욘사마 배용준이 자주 드나들던 집으로 널리 알려졌다. 갈치구이, 누룽지탕으로 유명하다. 일본 아줌마 관광객들도 단골로 찾는다. 이 집의 고사리무침이 별미.
흥미로운 사실은 역사가 오래 된 강북에는 호남식 한정식을 보기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삼청동, 북촌 등 서울 반가음식과 궁중음식, 개성식 한정식 명가들이 독점해버린 탓이다. 자연 후발주자인 호남식이 자리 잡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강남의 30년 이상 된 한식집들은 대략 70년대 혹은 80년대 초반 무렵 문을 열었다. 강남의 중심이 반포에서 압구정동으로 옮기던 시점이었으며, 땅값과 건물 임차료가 오르기 전이었다. 당시는 강북에 진입하는 비용이 더 높고 신흥개발지역인 강남이 오히려 더 쌌다. 80년대 중반만 하더라고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 건너편에 군데군데 호박밭과 공터가 있을 정도였다.
강북의 경우 전주집(서대문구 충정로3가 151-1·313-4030)이 그나마 강북에서 버티고 있는 호남식당. 서대문 충정로 경찰지구대 바로 오른쪽 낮은 골목으로 내려가면 다 쓰러져가는 기와집이 한 채 있다. 6천원짜리 한식을 먹어도 배추숙채, 두부조림과 젓갈로 한 김치, 도토리 묵 등이 나온다. 서울 마포 우성아파트 부근의 호남식당은 비오는 날 조기찌개와 더불어 소주 한 잔 마시기 좋은 곳이란다.
이제 인사동으로 건너가자. 우선 신일(종로구 관훈동 29-17·739-5548)이 있다. 푹 익은 김치가 서너 가지가 되고, 어리굴젓을 비롯한 젓갈류도 맛깔스럽다. 여기도 일본 아줌마들이 자주 진을 친다. 서대문 서울시교육위원회 앞 곰마루(종로구 평동 26-37·737-3403)는 목포출신의 여주인이 반찬을 총괄한다. 처음에는 토하젓을 내놨지만 서울사람들이 잘 먹지 못해 이제는 찾는 이에게만 준단다. 세종문화회관 뒷길에 있는 신안촌(종로구 당주동 167-2·738-9970)은 30여년 역사로 목포에서 직접 공수하는 낙지로 이름 난 곳이다. 매생이국과 홍어, 연포탕이 좋다.
◆ 그 외 소문난 지역 식당
집 부근을 화원으로 치장한 두레(인사동 8-7·732-2919)는 평범한 밥집에서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됐는데, 맛의 원천은 경남 밀양이다. 이 집 여주인의 어머니가 이미 밀양에서 50여년간 식당을 꾸렸던 경험이 유전된다.
인사동 선천(宣川·종로구 관훈동 100-4·734-1970)은 평양북도 전문 음식점이다. 이집은 서울에서도 외롭게 정말 고독하게도 북한음식만 고집하는 곳이다. 이당 김은호, 운보 김기창, 소설가 김동리, 시인 김광균 등 서울의 상당수 문화예술인들이 사랑한다. 허름한 기와집이 60~70년대 서울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
◆ 석파랑·민가다헌·필경재·삼청각 ‘퓨전 한정식’
궁중음식은 코스별로 나온다.
참고로 서울의 대표적 궁중요리 전문점은 고 황혜성(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보유자)의 딸 한복녀가 운영하는 지화자. 1인분에 얼추 15만~20만원. 현재 한정식당은 거의 퓨전이다. 지화자도 퓨전한정식으로 봐야 된다.
석파랑(종로구 홍지동 125·395-2500)은 흥선 대원군이 사랑한 별장이었지만 한정식집으로 변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다. 대원군이 철종 때 영의정 김흥근의 별장을 억지로 취한 것이다. 6·25후에는 고아원으로도 잠시 사용됐다. 점심은 5만원대, 저녁은 10만원대. 식기, 내부 인테리어 등을 감안하면 서울에서 가장 비주얼이 고색창연한 한정식집으로 평가받는다.
민가다헌(종로구 경운동 66-7·733-2969)도 팬들이 많다. 이 집은 일본강점기때 지어졌다. 건축주는 민보식,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오라버니다. 민가다헌도 서울시 민속자료 15호다.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필경재(445-2115)는 세종대왕의 5남 광평대군의 증손 이천수가 성종때 세운 한옥으로 당시 99칸이었다. 필경재는 87년 전통건조물 제1호로 지정됐다. 필경재는 성종이 하사한 것이다. 여기는 궁중요리를 낸다. 두텁떡, 신선로, 구절판, 너비아니 등을 먹을 수 있고 산책하기 좋은 후원이 디저트로 제공된다. 한국 반가(班家)의 매력을 외국인들에게 알리고 싶다면 한번 가볼 만하다. 낮은 4만2천~18만원, 밤은 8만5천~18만원. 17개 음식이 코스로 나오는 수라정식은 봉사료까지 합치면 1인분 21만8천400원.
장원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 요정정치 산실로 알려진 성북동 삼청각(765-3700)은 현재 <재>세종문화재단이 관리하는 국악 공연을 곁들여 식사할 수 있는 한정식 전문점이다. 남북 7·4공동성명 발표 당시 북측 대표들에게 식사를 대접한 곳이다. 드라마 ‘식객’ 촬영장소로 이용됐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취재협조=식객 칼럼니스트 황광해씨
종로구 경운동 ‘민가다헌’. 명성황후 친정 오빠 민보식의 집이다. |
욘사마 배용준이 즐겼던 강남 청담동 호남식 식당 ‘청담골’의 한상 차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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