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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미술관에서 개최된 '이건희 컬렉션' 21점을 소개하는 특별전 '웰컴 홈: 향연饗宴' 〈영남일보 DB〉 |
얼마 전(10월25일) 고(故) 이건희(1942~2020) 삼성그룹 회장의 타계 1주기를 맞았다.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부터 문을 닫았던 리움 미술관도 재개관하고 '고미술품 상설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는 700여 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온 고려 나전칠기를 비롯해 8점의 국보급 미술품이 처음으로 공개돼 경이적인 찬사를 받았다. 고미술품은 일제 강점기 일본·미국·영국·네덜란드 등 전 세계에 흩어진 것을 리움 미술관이 어렵사리 수집해온 컬렉션이라고 한다.
대구서 창업후 세계 초일류 기업 성장
故 이건희 회장 유산 50% 상속세 납부
학계 등 사회 각층에 기부문화도 앞장
3대째 가업으로 잇고 있는 '컬렉션'
대구시민이 염원한 이건희미술관 유치
연고지 무시 수도권 건립 일방적 발표
지역위한 문화예술 공헌 실망만 안겨
널리 알려지다시피 삼성 창업주 이병철(1910~1987) 회장은 대구에서 사업을 일으켜 부를 축적하고 이건희 회장은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시켰다. 이와 동시에 컬렉션도 가업으로 3대째 이어오고 있다. 창업과 수성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하여 대구를 흔히 삼성의 창업지라고 부르지만 사람으로 치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모태와 같은 곳이다. 일제 강점기 일개 상점으로 문을 연 삼성을 키우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초국가적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시킨 밑거름이 대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대구 사람들의 삼성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창업 초기(1938년) 삼성상회의 별표국수를 불티나게 팔아주었고 조선양조장의 월계관 청주만 찾았다. 창업 10년 만에 대구 제일의 갑부가 된 이병철 회장은 건국(1948년) 후 서울로 자리를 옮겨 삼성물산을 설립하고 국제무역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6·25전쟁이 발발하고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해 인공 치하에 갇히고 만다. 그때 이건희 회장은 초등학교 3년생.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1·4 후퇴 때는 빈손으로 대구에 내려왔다.
그 무렵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장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고 임직원은 주인 없는 기업을 운영하면서 사주몫으로 무려 3억원(현재 화폐 시세로 약 3천억원)의 이익금을 비축해 두었다. 이병철 회장은 그때 바로소 대구 사람들의 뚝심을 절감하고 정직과 신뢰를 경영이념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이 자금으로 부산에 내려가 삼성물산을 재건하고 제일제당을 설립해 돈방석에 앉게 된다. 신의를 지킨 대구 임직원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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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미술관 대구 유치를 염원하는 현수막. 〈영남일보 DB〉 |
대구경북의 인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없는 "됐나? 됐다!"라는 말 한마디로 신뢰를 보내는 것이 대구경북 인심이다. 그런 넉넉한 마음으로 전란 중에도 수많은 피란민을 다 받아들이고 낙동강 최후의 보루를 지켜냈다. 그러나 대구에 둥지를 틀고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온 삼성이 대구경북을 위해 공헌한 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곳곳에 산재한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삼성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이건희 회장의 손때 묻은 시설만 산업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세계적인 부호의 반열에 오른 이건희 회장은 자신의 사유재산 26조원과 컬렉션(감정가 약 3조원)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떠났으나 창업지 대구에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회장의 유산은 대부분 삼성그룹 주식이어서 상속세만도 12조원(유산의 50%)이 넘는다고 한다. 유족이 주식 일부를 매각하고 3세 이재용 부회장은 은행 대출까지 받는 등 상속세 납부를 위해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재벌가에서 상속세를 낼 돈이 없다니 기가 찰 일이다. 세계에 유례가 드문 가혹한 세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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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삼성가는 그동안 사회 공헌과 기부 문화에 크게 기여해왔다. 1970년대 선대 이병철 회장의 사재 출연으로 설립한 삼성문화재단은 학계와 사회 각계 각층에 알게 모르게 수백억, 수천억원씩 기부하고 사회복지 증진에도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다. 국내외 학술·언론·첨단과학·의학·사회봉사 등 각 분야의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호암상' 시상제도는 그 무렵부터 실시하고 있다.
그동안 삼성과 삼성가가 공익사업에 출연한 기금만도 20조원 규모에 이른다고 한다. 그 결과 이병철 회장의 아호 '호암' 또는 이건희 회장의 이름을 딴 학술회관·연구기관·장학회 등 전국 곳곳의 공익시설이 삼성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물려온 삼성가의 기부 문화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일쑤였다. 이른바 반삼성 정서다. "삼성은 위기 때마다 국면 전환용으로 로비자금을 뿌린다"는 혹평만 돌아왔다.
삼성은 기업을 일으키고 발전시켜 축적해온 부를 납세보국의 이념으로 사회에 환원해왔다. 그런데도 막대한 자금을 출연할 때마다 욕만 먹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타계한 이후 국민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외신에서 경쟁적으로 삼성을 재조명하고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 하나만도 746억달러(약 88조원)로 애플·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구글에 이어 글로벌 톱5에 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MZ세대들은 해외시장에서 우뚝 선 삼성 브랜드를 대할 때마다 "한국인의 자부심으로 삼게 된다"고 했다.
외신은 이건희 회장을 한국의 '전자왕'으로 소개하면서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에 비유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의 기부 문화가 100여 년 전 '기부 천사'라는 이름을 남기고 떠난 카네기와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카네기는 정직과 신용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축재의 귀재이자 부의 복음을 전한 자선사업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의 중흥기에 철강산업을 일으켜 성공한 카네기는 "정직은 신용을 낳고 신용은 부를 쌓게 한다"며 "재산을 가지고 죽는 것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세계 최대 부호가 된 그는 1889년 54세때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을 외치며 자선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때부터 "부자의 신성한 의무는 기업에 투자하고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며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그는 무턱대고 재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합리적인 조건으로 3억달러를 출연, 카네기재단을 설립했다. 카네기재단은 20억달러(약 2조5천억원)가 넘는 기금으로 교육·국제평화·민주주의 발전 분야에 연간 1억달러 이상 후원하고 있다. 삼성문화재단의 기금과 후원금도 이에 못지 않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기업에 대한 폐쇄적 인식과 기부 문화를 저평가하는 한국적 정서 때문이다. 그런 정서는 아직도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이건희 컬렉션'만 해도 그렇다. 삼성 창업지 대구에서 시작된 선대 이병철 회장의 컬렉션이 효시다. 그러나 정부는 아예 연고권을 무시한 채 공짜로 굴러들어온 것처럼 이건희미술관을 서울에 건립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해 대구시민들을 실망시켰다. 이럴 때 언뜻 "부를 흐르게 하라"는 세계 최대의 컬렉션 재벌 구겐하임가의 가훈이 떠오른다. 미국 뉴욕을 비롯해 독일 베를린,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 세계 곳곳에 미술관을 지어 명소로 만들고 유명 화가들을 발굴해온 구겐하임가는 1990년대 초반 스페인 북부의 쇠락한 공업도시 빌바오에 1억유로를 들여 미술관을 세웠다. 그 무렵 이건희 회장은 삼성 창업 50주년을 맞아 신경영을 선포하고 제일모직 대구공장을 구미로 옮겼다. 그때 국제적인 안목이 남달랐던 이건희 회장이 왜 제일모직을 이전한 자리에 자신의 컬렉션을 전시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만으로도 연간 100만명이 찾는 세계적인 예술도시로 거듭났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도시로 자랑해온 대구는 허허벌판만 남기고 떠난 제일모직 부지에 삼성창조경제단지를 조성하고 삼성의 산업문화유산을 관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삼성이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해 대구시에 기증했지만 한국의 구겐하임을 기대하는 대구시민들이 아직도 삼성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아쉬워하는 이유다.
이미애 <계명대 외래교수·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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