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진 가브리엘 신부가 무료 급식에 사용하기 위해 직접 담근 된장과 고추장 단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김병진 가브리엘 신부가 무료 급식소 간판 앞에서 급식소 '작은 형제의 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김병진 가브리엘 신부(글라렛선교수도회 낙산수도원장, 작은 형제의 집 운영)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마솥 밥의 달인'이다. 그는 벌써 12년째 매일 새벽 4시30분 일어나 30㎏의 쌀을 씻고, 커다란 가마솥 2개에 150인분의 밥을 짓는다. 노릇노릇, 바삭한 누룽지가 일품인 그가 만든 가마솥 밥의 비결은 한 치의 오차도 인정하지 않는 정확한 '불 조절'에 있다. 그는 이처럼 정성껏 지은 가마솥 밥을 인근에 사는 홈 리스, 장애인, 알코올 중독자, 나 홀로 어르신 등 필요한 누군가에게 소중한 한 끼 양식으로 전달한다.
고향 경북 영천서 영민하기로 소문 자자
경북고·서울대·카이스트까지 엘리트 코스
나환자 자녀 공부 돕다가 '신부의 길' 열려
伊 로마 성경교육 받으며 9개 언어도 통달
'좋은 이웃…아름다운 세상' 삶 방향 결정
인천의 신학대 성서 교수로 사제 첫 소임
동시에 선교 본당 운영하며 세상 속으로
사람 만나는 기쁨 커지며 무료급식소까지
새벽 4시30분 가마솥 2개 150인분 밥 지어
'위기에 처한 이에게 야전병원' 같은 역할
김 신부는 "예수께서 빵 5개,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행하신 것처럼 이곳 밥집에서도 매일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중"이라며, "한 끼의 밥을 나누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커다란 축복이고 섭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좋은 이웃 아름다운 세상
그를 만난 날, 강원도 속초의 더위는 절정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이마와 등줄기를 타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흔한 에어컨 하나 없이 김 신부는 온몸으로 여름에 맞서 씨름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커다란 가마솥에서는 다음 날 급식소 간식으로 쓸 옥수수가 푹푹 삶겨지며 열기를 뿜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기자를 맞은 그는 시계추를 돌려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된 '성소'로 말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골수염으로 1년간 집에서 꼼짝없이 누워 지냈어요. 심심하니까 각종 문학 전집류를 비롯해 눈에 보이는 잡지, 매일 집으로 배달되던 '영남일보'도 거의 외우다시피 읽고 또 읽었지요. 특히 성경책을 매우 흥미롭게 완독했는데, 어린 나이에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고향 경북 영천에서 영민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육상, 핸드볼, 배구, 야구선수 등 만능 스포츠맨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학업 성적도 뛰어나 당시 명문으로 꼽히던 대구 경북고에 진학했으며, 서울대 산업공학과와 카이스트 석사까지 엘리트 코스를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예기치 않은 운명적 만남이 찾아왔다.
"예전에는 소록도 나환자들뿐 아니라 그 가족들도 따로 모아서 지내게 했습니다. 대학 시절에 그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봉사를 했는데, 거기서 글라렛 수도회 신부님들을 만나며 막연히 꿈꾸던 신부의 길이 열렸지요."
당시 수도회 신부들의 주선으로 김 신부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성경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신구약 성경을 거의 암기하고, 히브리어·그리스어·불어·독어 등 무려 9개 언어를 통달할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로마에서 지낸 4년은 제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전 세계 각지에서 온 수도회 형제들과 생활하면서 친형제보다 더 끈끈한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귀국할 즈음엔 '좋은 이웃, 고마운 마음,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살겠다는 삶의 확고한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공동체 만들기 올인
사제로서 주어진 첫 소임은 인천의 한 가톨릭 신학대학에서 성서 교수로 활동한 것이다. 김 신부는 강단에서 강의하는 동시에 신부가 없는 작은 마을에 선교 본당을 운영하는 등 세상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갔다. 컨테이너, 신자의 집 등 환경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다 보니 어느새 신자의 수가 꽤 늘었다.
사람들과 만나는 기쁨이 커지면서 그는 결국 신학대학을 그만두고, 기도하며 봉사하는 삶에 더 충실하기로 한다. 특히 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청빈한 삶을 고집했다. 그는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현재도 월급을 받지 않는다.
"IMF 때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실직자가 늘었어요. 저희 신자 중에도 직장을 잃은 이들이 나왔는데, 수입이 없어진 그들을 위해 평소에 내던 교무금 만큼 매달 되돌려주었습니다. 성당이야 당장 어려워도 헌금과 예물이 있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으니, 먼저 어려운 신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고 싶었거든요."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그의 남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다. 또다른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가끔 밥집을 찾아오던 알코올 중독자가 겨울철 바닷가에서 동사한 것이다. 김 신부는 이때도 즉각 대처에 나섰다. 밥집을 이용하는 여러 알코올 중독자들을 '달방'으로 안내해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난방유가 없어 덜덜 떨고 있는 어르신들의 집에는 기름을 넉넉히 보충해주었다.
'어려운 것을 도와주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김 신부의 배려심에 사람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알코올 중독자, 장애인, 나 홀로 어르신에 이어 다문화 외국인까지 속속 그를 찾아왔다. 김 신부는 밥집을 찾은 식구들을 위해 생일파티도 열고, 정기적으로 온천욕을 시켜주는 등 따듯한 공동체 만들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제가 신자들 대상으로 성사집행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제가 맡은 소임은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 선포자로서 세상을 보호하는 저의 사명일 것입니다."
◆둘레길 걸으며 봉사하는 삶
전국서 봉사자들이 찾아오는 그의 밥집은 잘 익은 밥 냄새만큼 구수한 사람 향기가 진동한다. 그와 개인적 인연을 가진 이들이 멀리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에서 노력 봉사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다. 고교 시절 친구가 의료봉사에 나섰는가 하면 사제서품을 함께 받은 동기 신부들은 십시일반 돈을 걷어 그가 타고 다닐 차량을 후원했다. 경북고 동기, 영천성당 친구들 등 대구경북에서도 정기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찾고 있다. 이제 그는 후원자와 밥집을 찾는 이용자를 연결해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꿈을 꾸고 있다.
"제 삶의 모토는 기도하면서 봉사하는 삶이에요.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져 생태복지마을을 일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당장 실천하기에는 현실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우선 둘레길과 봉사활동을 접목한 프로그램을 고민 중입니다. 봉사하고 싶은 분들이 둘레길을 걷다가 앱을 통해 정보를 접하고, 봉사하고, 기도하며 영성을 키우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에 종교란 무엇이며, 교회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김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빌려 설명했다.
"지금 세상은 전쟁터와도 같습니다. 각종 천재지변과 세대 간, 계층 간 분열과 갈등으로 한 치 앞을 예견하기 어려울 지경이지요. 교황께서 '오늘날 교회는 야전병원'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위기에 처한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지금 교회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글·사진=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김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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