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응급실 단상

  • 곽현지 곽병원 홍보계장
  • |
  • 입력 2024-10-15  |  수정 2024-10-15 07:03  |  발행일 2024-10-15 제22면
2024101401000432000016371 9월22일 일요일 밤 갑자기 온몸에 가려움증을 동반한 두드러기가 났다. 이튿날 출근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불면의 밤이 더욱 길게 느껴졌다. 아침이 되자 증상이 호전하는 듯하더니 밤이 되자 다시 심해졌다. 밤 11시쯤 곽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응급실 전문의 M 과장님께 대충 증상을 설명드리고 엉덩이 주사를 놔달라고 다급하게 호소했다. 노련한 과장님은 그렇게 해줄 수 없다며 환부를 자세히 관찰했다.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열은 나는지 등 활력징후 체크와 함께 원칙대로 꼼꼼하게 문진을 하셨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주사약 처방을 받고 수액을 맞으며 '이젠 됐다' 싶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쉰다.

늦은 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은 것은 난생 처음이다. 한밤중에 갑자기 아파도 이렇게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 순간 응급실 과장님의 흰 가운이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흰 가운은 의사의 상징이자 권위를 나타낸다. 약사, 과학자, 실험실 연구원도 흰 가운을 유니폼으로 입는다. 하지만 의사의 흰 가운은 의미가 각별하다. 인간에게 세례를 주는 성직자의 성의(聖衣), 인간의 죄를 판단하는 법률가의 법의(法衣)와 함께 인간의 몸에 칼을 댈 권리가 주어진 의사의 흰 가운은 여타의 제복과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그 흰 가운으로 상징되는 의료인들 중 일부가 의료 현장을 떠났다. 송사를 경험한 의사들은 생존율이 낮아도 과감하게 도전했던 수술을 확률이 조금만 낮아도 수술을 꺼리는 방어 진료를 한다고 한다. 비급여 미용 진료과의 폭발적인 증가, 의사들의 직업윤리에 대한 사회적 지탄, 응급실의 배후 진료를 담당해야 하는 필수 의료 과목의 붕괴. 대한민국 의료체계의 총체적 난국이다. 자신의 직업을 이타적 소명으로 여기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소신껏 환자를 치료해왔던 기성세대 의사들은 작금의 위기 상황에 대해 환자와 국민을 위해서라도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호소한다.

우리나라 응급의료기관은 권역응급의료센터, 지역응급의료센터, 지역응급의료기관, 전문응급의료센터로 구분한다. 전국 응급의료를 총괄하는 국립의료원, 시·도를 총괄하는 권역센터, 지역을 맡는 지역센터가 규정에 따라 지정되어 있다. 센터와 기관은 응급의학 전문의를 포함한 의료진과 응급실 규모의 차이에 따른다. 응급의료기관으로 인증받은 병원은 인공호흡기, 심장충격기, 부착형 산소 등 장비를 갖추고 있는지, 충분한 병상 수를 확보하고 있는지, 병상 당 규정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지 등 서면 평가 및 현장 실사를 주기적으로 받는다. 우리나라만큼 응급실 문턱이 낮으면서 질적으로 우수하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나라는 드물다. 미주 한인 동포 사회에서 '건강검진은 물론, 복잡하고 위험한 수술은 무조건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우리나라 의료 수준은 세계적이다.

M 과장님이 잠시 밖에 나가면서 조심스럽고도 정성스레 개어놓은 흰 가운을 보며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응급실에서 생명을 구하고 있는지.

떠난 전공의들, 병원에 남아서 주말·야간 가리지 않고 수술하고 있는 의료진들, 구급차에 몸을 싣고 불안한 마음으로 길 위를 헤매고 있는 환자 모두가 힘겹고 고통스럽다. 사회적 갈등의 조정역할을 하는 정치와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던 의료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솔로몬의 지혜와 히포크라테스의 눈물이 동시에 요구되는 시기다.
곽현지 곽병원 홍보계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