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산 해발 600m구릉지에 포산마을이 있다. 500여 년 전우씨 일가가 처음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예부터 산머루가 많아 머루산이라 불렀는데 지역 말로는 구머리, 한자 표기로는 포산(葡山)이라고 한다. 포산 마을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진보면 소재지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황장삼거리까지 16㎞, 다시 911번 지방도에 올라 화매삼거리까지 3.6㎞, 또다시 917번 지방도로 1㎞ 정도 가면 '포산' 버스정류장이다. 정류장 앞 아주 커다란 안내판에 '행복고도 600, 포산 머루산 성지'라 적혀 있다. 기우뚱 선 포산동 표석의 몸짓따라 좁은 길로 들어선다. 포산마을은 이 길 따라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신유박해때 신자들 숨어 교우촌 형성
1815년 을해박해 후 뿔뿔이 흩어져
항일투쟁 신돌석 장군 드나들기도
지금은 19가구 농사 지으며 오순도순
장구메기 습지 국가보호지역 지정
1815년 을해박해 후 뿔뿔이 흩어져
항일투쟁 신돌석 장군 드나들기도
지금은 19가구 농사 지으며 오순도순
장구메기 습지 국가보호지역 지정
◆행복고도에 다다르는 길고 깊은 길
포산마을 머루산 성지까지는 3.6㎞, 구불구불 좁은 길을 가파르게 오른다. '여기서부터 포산마을로 가는 솔향기 나는 산림 도로가 시작됩니다.' 포산마을까지 2.1㎞를 앞두고 다정한 안내문이 걸려 있다. 금강송으로 둘러싸인 협소한 길을 바짝 긴장한 채 오르며 산바람에 핑그르르 일렁이는 바람개비를 스친다. 마을까지 1.8㎞ 지점인 '바람개비 화원'이다. 이어지는 고갯길은 '반보기고개'다. '반보기'는 친정 나들이가 어렵던 시절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중간쯤에서 만나 정을 나누었다는 오래되고 애틋한 풍속이다. 벤치와 테이블, 항아리들로 꾸며진 고갯길 숲에서 목메는 시를 만난다.
'포도산 구비마다/ 패랭이꽃 피고 지고/ 시집과 친정 사이/ 반보기로 달랬지만/ 돌아서는 발길 뒤에/ 눈물자국 남았구나/ 못다 나눈 모녀의 정/ 마디마디 새겨 넣은/ 두 그루의 갈참나무/ 모녀인 듯 마주 섰네.'
시인의 이름은 없으나 누군가 매일 쓰다듬는지 시판에 낙엽 하나 없다. 그러고 보니 차곡차곡 쌓인 항아리들이 까치발로 기다리는 엄마 같다.
마을까지 1.2㎞ 지점은 '노루목쉼터'다. 큰 소나무 아래 테이블과 나무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길고 깊은 길에서 지칠까, 고될까, 궁금할까 염려하여 만든 사려 깊은 따뜻함을 느낀다. 조금 더 오르면 양지바른 곳에 무덤 한 기가 자리한다. 태백산 호랑이로 불렸던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부인 한재여 여사의 무덤이다. 여사는 동갑내기 장군과 스무 살에 혼인했다. 꽃다운 신혼도 잠시, 일제에 의해 전 재산이 몰수되었고 장군마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모진 고초를 겪으며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항일 의병장의 가족이라 주변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이하고도 혼란한 시국 속에 궁핍한 삶을 이어가다 1952년 처절한 생애를 마쳤다. 넉넉한 햇빛 속에 봉분이 단정하여 이름 모를 누군가의 곡진한 몸짓이 그려진다.
◆포산마을 머루산 생명의 성지
널찍한 주차장이 나타난다. 마을 어귀다. 산 아래로 멀리 석보면 소재지가 보인다. 가슴이 탁 트이는 풍광이다. 마을 안 도로 폭이 협소하고 주차공간이 없기에 방문객 차량은 여기에 주차하고 들어가라는 안내문을 지난다. 잠시 후 돌연 하늘이 열리고, 잘 빚은 그릇처럼 부드러운 분지 땅에 들어앉은 마을과 논밭이 펼쳐진다. 어느 날 움직임을 멈춘 화산의 분화구 같고, 운석이 남긴 크레이터 같고, 하늘을 응시하는 샘 같고, 커다란 심호흡 같다. 먼 산 능선들의 중첩이 수평선으로 느껴지는 600고원, 포산마을은 하늘가의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인근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란을 왔다고 한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홍주, 예산 등 충청도 일대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와 교우촌을 이뤘다. 15년 뒤인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머루산 교우촌을 덮쳤다. 부활절이었다. 33명의 신자가 체포되어 안동감영으로 이송됐다. 이때 20명은 풀려났으나 나머지 13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대구감영에서 순교했다. 시간이 흘러 2014년 8월16일, 머루산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대구 감영 관덕정에서 순교한 김시우 알렉시오와 이시임 안나, 한때 머루산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울진에서 체포되어 원주에서 순교한 김강이 시몬 등 3명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머루산은 천주교 복자 3명을 배출한 성지다.
동구 삼거리에 '머루산 성지 500m' 안내판이 왼쪽을 가리킨다. 마을회관을 지나 깊은 숲으로 든다. 영양군은 천주교 안동교구와 협력해 머루산 성지를 정비하고 역사의 현장으로 보전하고 있다. 정자와 쉼터를 만들고 데크로드와 야자매트로 800m에 이르는 성지 역사탐방로를 조성해 순례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성지는 아담하고 고요하다. 성모상과 십자가 고상을 가운데 두고 십자가의 길 14처가 에워싸고 있고, 맞은편에는 미사와 휴식을 할 수 있는 쉼터가 있다. 머루산 성지 주변으로는 300그루의 머루나무가 심어져 있다. 머루의 속(屬)명은 바이티스(Vitis), 생명을 뜻한다.
을해박해 이후 머루산 교우촌은 완전히 없어졌다. 남은 신자들 또한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후 교우촌이 사라진 머루산에는 동학교도가 성행했다. 구한말에는 신돌석 의병대장이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하며 이곳을 드나들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1919년 3·1 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을 때 이곳 주민들도 가담하여 왜경의 탄압을 받았다.
포산리는 석주 이상룡의 동생인 이상동 선생이 교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전후에는 공비들의 출몰로 어려움을 겪었다. 현재 포산마을에는 19가구 31명이 고추, 사과, 오미자 등을 키우며 산다. 새소리와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를 듣고, 햇빛과 별빛 속에서 사계절을 오롯이 느끼며 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포산마을은 '행복고지 600'이다.
◆국가 습지 보호지역, 장구메기 습지
동구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장구메기다. 포산리의 자연부락으로 지형이 장구처럼 생겨서 생긴 이름이다. '장구메기 가는 길 2.3㎞' 안내를 따라간다. 정자가 있는 아담한 연못을 지난다. 휴식 공간이자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마을의 소공원이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진 자리에는 키 큰 정자와 전망데크가 있다. 별 사진을 찍는 낭만가들이 이따금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단다. 전망대에서 보는 포산리의 밭이 근사하다. 작은 천들을 알뜰히 모아 곱게 바느질한 조각보 같은 모습이다.
산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한다. 장구메기는 산 정상부에 자연적으로 물이 모여 수량이 유지되는 흔치 않은 땅이다. 둘러싼 산지에서 6개의 물길이 흘러들어 습지를 만드는데, 벼가 자라기 좋은 조건이라 오래전부터 논농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점차 떠났고 200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논 경작이 완전히 중단됐다. 그렇게 내 버려진 논은 다시 습지가 되었다. 장구메기 습지는 지난 9월 10일 국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축구장 약 6개 면적인 약 4만 5천㎡의 규모로 지금까지 458종의 생물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중에는 삵과 담비, 하늘다람쥐, 참매, 팔색조, 긴꼬리딱새 등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6종도 포함돼 있다.
얼핏 특별한 것 없어 보이지만 숲으로 들어서면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땅이 드러난다. 오리나무와 옥잠난초가 군락을 이룬다. 버드나무와 물꽈리아재비가 넓게 어우러지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물봉선과 꿩고비 등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가득하다. 쇳소리를 내며 크게 우는 저 이는 동고비인가. 열심히 나무둥치를 두드리는 것은 쇠딱다구리다. 오, 상당한 고마리 군락이 있다. 무리 지은 고마리는 인간의 농경문화와 자연습지 생태계가 어우러졌다는 증거라 한다. 고마리의 꽃말은 '꿀의 원천'이다. 포산리는 꿀이 흐르는 행복 고원이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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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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