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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는 1975년 창간 30주년을 맞아 6·25전쟁 당시 영남일보 지면에 작품을 발표했던 주요 문인들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었다. 당시 문인들의 대구 피란생활을 회고한 좌담회 내용은 그해 10월11일자에 게재됐다. |
영남일보는 6·25전쟁 중 대구에 둥지를 튼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다. 특히 서울의 매일신보 학예부장 출신이었던 당시 사장 김영보와 안면이 있던 터였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을 비롯해 정비석, 김동리, 김팔봉, 김소운, 최정희, 최인욱, 최태응 등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신문사에 북적였다. 그들은 영남일보에서 신문을 읽고 담배를 피우며 피란살이의 고단함을 달랬다. 밤엔 편집국 의자를 붙여놓고 그 위에서 잠들기도 했다.
특히 영남일보는 문인들에게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당시 영남일보는 전쟁 중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발행된 전국 유일의 신문이었다. 마땅히 작품을 발표할 매체가 없었던 문인들에게는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작품이 이 시절 쏟아졌고, 전선문학은 영남일보를 통해 전성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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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종군문인단의 부단장이었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1952년 1월1일자 영남일보 신년호에 '1952년의 전망…불안의 절정에서'라는 제목으로 그해 한국 문화계를 전망하는 글을 실었다. |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들도 영남일보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들 역시 문총구국대 혹은 종군작가(문인)단의 일원으로 대구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갔고, 특히 영남일보를 통해 격동의 시대를 기록했다.
공군종군문인단의 부단장이었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1952년 1월1일자 영남일보 신년호에 그해 한국 문화계를 전망하는 글을 실었다. '1952년의 전망…불안의 절정에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지훈은 '역사의 향방이 오늘처럼 이렇게 엉클어진 적도 그다지 많았던상 싶지 않다. 이럴 것 같기도 하고, 저럴 것 같기도 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전망이 서질 않는다는 것은 곧 장래를 내다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쓰러지지 말고 조금만 더 참자. 이것이 1952년 전쟁에 휩싸인 한국문화계의 동의(動議)가 될 수 밖에 없다.'
박목월은 영남일보 1951년 1월1일자 신년호에 시 '새로운 봄에'를 발표하며, 겨울을 이겨낸 봄처럼 시련이 클수록 전쟁의 승리가 빛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힘을 모을 때라고 촉구했다.
'(전략) 다시 벗이여/내가/넌줏이/일러주노니/시련(試鍊)이/크면 클수록/우리의 승리가/한결/빛남을 아느냐. (중략) 우리가/피로써 살길을 여는/그러기에 더욱 찬란한 봄이여/아아/우리가/목숨과 정성과/힘을 모아/비로소 사는/그러기에 더욱 찬란한 봄이여/오로지 우리의/조그만 힘이/무궁하고 어마어마한/행복(幸福)의 밑자리를/놓음에 이바지되는/그러기에 한결 영광(榮光)스런 봄이여.'
박두진은 1952년 9월3일과 4일자에 수필을 두 차례 연재했다. 대구에서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하며 전란 중에도 우리 사회에는 아직 인정이 남아있고,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글을 갈무리했다. 공군종군문인단의 부단장이었던 조지훈은 1952년 1월1일자 영남일보 신년호에 그해 한국 문화계를 전망하는 글 '1952년의 전망…불안의 절정에서'를 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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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월1일부터 영남일보에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여성전선(女性戰線)'은 파격적인 애정관을 작가 특유의 필치로 그려내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대표작인 '자유부인'을 쓰게 된 실질적인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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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영남일보 연재소설 '스딸린의 老衰(노쇠)'. 1951년 6월7일부터 18일까지 총 8회에 걸쳐 실린 이 작품은 말년에 이른 스탈린의 내면을 다루었다. |
영남일보는 소설 장르의 전선문학을 개척한 요람이기도 했다. 1·4후퇴 이후 영남일보에는 본격적으로 소설이 연재됐다.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소설가 김동리의 '스딸린의 노쇠(老衰)'가 그 첫째 작품이었다. 1951년 6월7일부터 18일까지 연재된 김동리의 소설은 소련이 6·25전쟁의 배후로 개입하게 된 내막과 말년에 이른 스탈린의 내면을 다룬 작품이었다.
영남일보 연재 소설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육군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하던 정비석의 '여성전선(女性戰線)'이었다. 이 소설은 1952년 1월1일 첫 회가 실린 후 그해 7월9일까지 총 180회가 연재됐다. 대립적인 성격의 두 여성을 통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애정관을 작품 속에 드러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연재 도중 영화화하기로 결정되었고, 전쟁 이후인 1957년 김기영 감독에 의해 실제 영화로 제작됐다.
특히 정비석이 자신의 대표작인 '자유부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영남일보의 '여성전선'이 실질적인 계기가 됐다. 자유부인은 전쟁 직후인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성 윤리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 섰던 문제작이기도 했다. 당시 서울신문 측은 영남일보에 연재한 정비석의 '여성전선'이 큰 인기를 끌었던 것에 착안해 작가의 서울 귀환 기념 작품으로 자유부인을 청탁했고, 이후 신문 연재 소설 초유의 인기를 모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된 인연
전쟁이 끝나고 피란 문인들은 하나둘 서울로 떠났다. 하지만 문인들은 그들을 안아준 영남일보와의 인연을 끝까지 이어갔다. 휴전 이후에도 수시로 자신들의 글을 지면에 실었다. 청마 유치환은 1954년 8월7일자에 대구에서 출간된 두권의 시집을 읽고 쓴 서평을 기고했고, 청록파 시인 박목월은 창간 20주년을 맞은 영남일보에 축시 '그것은 빛'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 시는 1965년 10월12일자 1면에 실렸다. 문총구국대 경북지대장이었던 한솔 이효상은 전쟁 이후 국회의장에 취임했고, 영남일보 창간 기념 때마다 축하 휘호를 보내오기도 했다.
전란 속에서 문인들이 머물렀던 대구, 피란과 격동의 시대를 표류하며 거닐었던 그 공간은, 이제 희미한 기억 저편에 빛바랜 사진처럼 앉았다. 하지만 그 시절, 그들이 영남일보에 발표한 작품은 지금 한국문단에 '불멸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영남일보 창간 80주년 기념 사업단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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