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추 거문고 이야기] <35> 금도(琴道) 이은 옥보고와 윤흥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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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6-13 07:57  |  수정 2025-06-13 09:05  |  발행일 2025-06-13
지리산 칠불사. 옥보고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운 운상원이 이곳에 있었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지리산 칠불사. 옥보고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운 운상원이 이곳에 있었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신라의 거문고 대가인 옥보고(玉寶高)는 신라에 거문고의 전통이 뿌리내리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거문고가 언제 신라에 전래됐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693년에 거문고가 신적(神笛) 만파식적과 함께 신라의 국보로 보관된 사실로 보아 그 이전에 유입되어 연주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거문고 명인 옥보고

'신라 사람 사찬(沙湌) 공영(恭永)의 아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운지 50년에 신조(新調) 30곡을 자작하여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貴金) 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 선생도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신라왕이 금도(琴道)가 끊어질까 근심하여 이찬(伊湌) 윤흥(允興)에게 일러,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음률을 전해받아 얻도록 하라 하고, 남원의 공사(公事)를 위임하였다. 윤흥이 부임하여 총명한 소년 두 사람을 뽑으니, 그 이름이 안장(安長)·청장(淸長)이었다. (중략) 안장은 그 아들 극상(克相)·극종(克宗)에게 전하고, 극종은 일곱 곡을 지었다. 극종의 뒤에는 거문고로서 직업을 삼는 자가 한둘이 아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옥보고는 통일신라의 귀족층인 육두품(六頭品) 출신이다. 옥보고의 활동 시기가 밝혀지지 않아 신라사회의 거문고 수용이 언제쯤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라사회 6두품 출신의 옥보고가 지리산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거문고의 전통을 특정인에게만 전승한 이유는 그가 고구려 유민의 악사(樂師)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옥보고가 거문고를 공부한 운상원은 지리산 칠불사에 있었다. 칠불사가 위치한 하동군 화개면에 '정금(井琴)'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 이름은 옥보고가 칠불사 운상원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면 이 마을의 우물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하여 명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금송정(琴松亭)이 있었는데, 이 정자는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는 기록이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하는 내용은 '금송정은 금오산 정상에 있다.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세상이 전하기를 옥보고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이다.


금오산(468m)은 경주 남산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에 있는 남산(494m)은 옛 월성 왕궁의 남쪽에 솟은 산을 의미한다. 고위산(高位山)으로도 부르는 이 남산의 산 이름도 이런 지리적 환경에서 유래했다. 금오산을 남산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 계곡 전체를 통틀어서 남산이라고 한다.


금오산에서 서북쪽으로 얼마간 치우쳐 있는 냉곡 암봉 정상에는 사방 5m 넓이의 터를 확인할 수 있다. 금송정(琴松亭)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금송정이 금오산 정상에 있다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는 달리 향토사학자들은 이곳 정상에 금송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금송정 앞에는 봉생암(鳳生岩)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옥보고가 거문고를 탈 때 봉황새가 날아와서 춤을 추다가 앉은 바위라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옥보고가 지은 30곡이 다음과 같이 삼국사기에 전해오나 어떠한 음악인지는 알 수 없다.


상원곡(上院曲) 1, 중원곡(中院曲) 1, 하원곡(下院曲) 1, 남해곡(南海曲) 1, 기암곡(倚嵒曲) 1, 노인곡(老人曲) 7, 죽암곡(竹庵曲) 2, 현합곡(玄合曲) 1, 춘조곡(春朝曲) 2, 추석곡(秋夕曲) 1, 오사식곡(吾沙息曲) 1, 원앙곡(鴛鴦曲) 1, 원호곡(遠岵曲) 6, 비목곡(比目曲) 1, 입실상곡(入實相曲) 1, 유곡청성곡(幽谷淸聲曲) 1, 강천성곡(降天聲曲) 1이다.


금도(琴道) 명맥 잇게 한 윤흥(允興)

옥보고는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던 거문고를 다시 부활시켜 그 명맥을 잇게 한 주인공이다. 금도(琴道)는 다시 속명득의 제자 귀금(貴金)으로 이어졌으나 세상으로 나오지 않자, 신라왕은 거문고의 연주법이 단절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찬(伊湌) 윤흥(允興)으로 하여금 거문고가 세상으로 나오게 하라고 명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됐듯이, 이에 대한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윤흥은 거문고 명인들이 거처하던 지리산 지역과 근접한 남원 공사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왕이 특별히 지시했던, 거문고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계획의 첫 단계로 관아의 총명한 소년 두 사람을 선출했다. 이 청년이 바로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이다. 윤흥은 이 두 청년으로 하여금 지리산에 들어가 귀금으로부터 거문고를 전수받으라고 명했다. 귀금은 이 두 청년을 제자로 받아들여 거문고를 전수하기는 하였지만, 그 중 미묘한 곡 3곡은 전수하지 않았다. 윤흥은 다시 귀금을 찾아가 최후의 한 곡까지 전수시켜 줄 것을 부탁한다.


흥미로운 점은 윤흥이 귀금에게 가서 사정을 하는 부분이다. 윤흥은 귀금을 찾아갔을 때 그의 아내와 함께 동행을 했다. 그리고는 윤흥은 두 손으로 술을 받들고, 그의 부인은 잔을 들고 무릎으로 기면서 성의를 다했다고 한다. 윤흥이 살던 삼국시대에는 남편의 공적인 업무에 부인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열과 성의를 다해 귀금 선생을 설득한 윤흥은 그 보답으로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전수받게 되었다.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한 거문고 연주법은 안장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 두 형제에게 전해지고, 극종은 직접 7개의 곡을 작곡한 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과 성의를 다해 거문고 연주법을 후대에 전수하는 데 크게 공헌한 윤흥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불행히도 '모역을 꾀한 반역자'였다. 윤흥은 당시 왕이 될 수 있는 신분, 즉 진골로서 문성왕 때 왕실 측근으로 왕권에 밀착되어 활약했었다. 그러나 문성왕 이후 헌안왕을 지나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위가 균정계(均貞系)에서 헌정계(憲貞系)로 넘어가고 균정계 내에서는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후 다시 균정계에서 왕위를 찾으려고 했다. 이 반란에 윤흥과 그의 형제 숙흥(叔興), 계흥(季興)이 연류된 것이다.


경문왕 6년(866년) 10월 추운 겨울, 윤흥은 반역을 꾀하려던 계획이 발각되어 대산군(岱山郡·지금의 경북 성주)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곧 뒤쫓던 무리에게 붙잡혀 목이 베였고, 그 일족이 몰살당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윤흥이 당시 왜 그런 처신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금도(琴道)를 오늘날까지 이어올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크게 공헌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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