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희의 쉰셔널지오그래픽] 요즘 TV 사용법

  • 서상희 크레텍 이사·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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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4-02 16:03  |  발행일 2026-04-03
오래 쓰던 TV가 고장나 새 제품을 사려 하는데,  15년 전에는 없던 복잡한 선택지에 당황해 기술용어를 공부하게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오래 쓰던 TV가 고장나 새 제품을 사려 하는데, 15년 전에는 없던 복잡한 선택지에 당황해 기술용어를 공부하게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15년간 쓰던 TV가 제 임무를 완수하시고 소천하셨다. 수리팀을 불렀더니 이젠 부품이 없다며 '정 고치려면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대기업 A/S 기사다운 명약관화한 답변을 주셨다. 겉은 멀쩡한 데다 여전한 최신기능에 말도 잘 알아듣는 나의 텔레비전. 퇴근해 '지니야 티비 켜줘' 하면 '티비를 켭니다'라고 발랄하고도 친절하게 답하던 그 녀석이 하루아침에 입을 다물었다. 화제작 '왕과 사는 남자'가 OTT에 풀리기만을 기다리며, 봄날의 섬 관매도에서 가져온 쑥 막걸리를 한잔 들고 감상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소박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화는 흥행 가도를 달리며 극장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데, 정작 우리 집 TV가 먼저 명줄을 놓아버릴 줄이야.


이맘때쯤 가장 맛있는 관매도 쑥 막걸리. 이걸 옆에 끼고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OTT에 풀리면 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건만, 영화는 극장에서 내려오지 못할 만큼 인기이고 내 TV가 먼저 수명을 다했다. <본인 제공>

이맘때쯤 가장 맛있는 관매도 쑥 막걸리. 이걸 옆에 끼고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OTT에 풀리면 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건만, 영화는 극장에서 내려오지 못할 만큼 인기이고 내 TV가 먼저 수명을 다했다. <본인 제공>

결국 새 TV를 사기 위해 전장에 뛰어들듯 매장을 찾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15년 전에는 없던 낯선 외계어들의 향연이었다. LED, OLED, QLED, 나노셀, QNED…. 여기에 각 제품의 헤르츠(㎐)까지 파악하고, HD, UHD 송출 상태까지 고려해야 한단다. 뭣이라? 뭘 알아야 묻기라도 하지. 이래서는 점원과 대화도 되지 않았다. 거기다 같은 사이즈라도 기능에 따라 가격이 10배 차이 났다. 소득격차가 심해진다고 투덜댔더니 기술격차는 더 나는 시대가 돼 있었다. 나는 대학입시 이후 처음으로 사전이란 것을 꺼내 들었다. 즉 각종 블로그와 유튜브를 참고해 노트를 옆에 놓고 용어정리를 시작한 것이다. 진작 이렇게 공부해 출세나 할 걸, 뭣 하러 오십 줄에 TV 한 대 산다고 기술용어를 공부한단 말인가. 혹시나 나처럼 매장에서 길을 잃을 그대를 위해 노트를 풀자면 다음과 같다.


①스스로 빛나는 자 vs 빌려 쓰는 자: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는 쉽게 말해 '자체발광'이다. 백라이트라는 도움 없이 픽셀 하나하나가 스스로 빛을 낸다. 가격이 가장 비싼 이유는 이 '스스로 타오르는 자존심'의 몸값이다. 나노셀&QLED는 LCD라는 근본 위에 '나노 입자'나 '퀀텀닷 시트'라는 화장품을 덧바른 녀석들이다. 나노셀은 색의 순도를 높여 탁함을 잡고, QLED는 밝기를 극대화해 대낮에도 쨍한 화면을 보여준다. 중산층 가정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것들이다.


②찰나의 부드러움, 헤르츠(㎐): 13년 전 티비가 60㎐였다면 요즘 것들은 120㎐, 144㎐를 논한다. 숫자가 높을수록 화면 속 움직임이 비단결처럼 부드럽다. 화면 입자만 따지지 말고 몇 헤르츠를 쏘느냐도 봐야 한다.


③AI라는 보이지 않는 두뇌: 비슷해 보이는데 왜 어떤 건 10년 치 적금상품만큼 비쌀까? 화면입자에 이어 AI도 한몫을 한다. 소리도 공간에 맞춰 입체적으로 뿌려주는 등 지능의 차이가 가격을 결정짓는다.


이렇게 공부를 해 '오늘은 결판 내자'고 매장을 방문했다. 이미 많은 것을 아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초롱초롱 두 눈을 뜨고 아주 똑 부러지게 점원을 쳐다봤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해 그만 이 말이 나오고 말았다.


"삼성이 좋아요? 엘지가 좋아요?"


점원은 눈빛은 똑똑할지언정 입은 맹한 나를 보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복불복입니다."


브랜드보다 제품상태가 좌우한다는 뜻이었다. 아, 이 사람 봐라!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누구 탓을 하지도 않으면서, 누구 하나 피 묻히지 않고, 누구 하나 열등하지 않도록 배치해, 대번에 공감을 일으키는 이 정치적인 어법은 뭐지? 이 사람을 대구시장 시켜야겠어.


5월25일까지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특별전. TV 등 미디어를 이용한 설치미술작품을 통해 기술-예술-인간이라는 동시대적 질문을 던진다. <본인 제공>

5월25일까지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특별전. TV 등 미디어를 이용한 설치미술작품을 통해 '기술-예술-인간'이라는 동시대적 질문을 던진다. <본인 제공>

영국작가 빌 브라이슨은 책 '나를 부르는 숲'을 통해 그의 애팔레치아 산맥 트레일 여정을 기록했다. 험난한 분투기를 예상하며 책의 첫 장을 펴는 순간, 커피를 마시고 있다면 뿜지 않을 수 없다. 산을 넘겠다며 배낭부터 구입하는 그는 아웃도어 용품들의 진화된 신기술 앞에서 태산준령보다 더 높은 용어격차를 느끼고 만다. 방수원단의 용어와 가격 앞에 그는 산맥지도는 손에 쥘지언정 세상변화를 손에 쥐지 못한 자신을 발견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결정에는 기세라는 것이 있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유일하게 기세를 부리지 못한 것이 나의 이번 TV 구매기였다. 모르고 결정하면 '복불복' 즉 재수 없는 것이 걸려서 안 좋다더니 헛소문만 퍼뜨리는 사람이 될까봐 나름 따져보려 애썼다.


매장을 나오며 생각했다. 빌 브라이슨의 책 속 여행자들이 그렇듯, 나도 이 작은 구매 여정을 다녀와서야 내가 얼마나 '머물러 있던' 인간인지,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멀리 떠나가 버렸는지 새삼 실감했다. 아직은 세상과 떨어지고 싶지 않다. 끝까지 착 붙어서 너를 따라가겠다.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조금이라도 나은 방식이 되도록, 그게 작은 TV 한 대가 되든 아님 거대한 미래 결정사가 되든 애써 세상을 따라갈 나를 칭찬해. 이 글을 보고 웃어 줄 그대를 칭찬해. 함께 나아갈 우리를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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