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영천 임고의 봄] 오고 가고 또 가고 정신없이 오고 또 간다, 봄날의 꿀벌처럼…

  • 류혜숙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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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4-03 14:41  |  발행일 2026-04-03
영천 벚꽃100리길 초입의 곰들덤 공원.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곰들덤은 구전되어온 명칭으로 곰바위 절벽 또는 곰들이 놀던 들판이라는 뜻이다.

영천 벚꽃100리길 초입의 곰들덤 공원.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곰들덤'은 구전되어온 명칭으로 '곰바위 절벽' 또는 '곰들이 놀던 들판'이라는 뜻이다.

달력을 넘긴다. 크고 진하게 프린트된 '4월' 옆 빈 공간에 초록색 펜으로 휘갈겨 쓴 '임고, 자호천, 봄'이라는 메모가 있다. 하늘은 오래된 목화솜 이불을 덮은 듯 멀겋지만, 마당에 앵두꽃이 만발하였으니 냉큼 나선다. 고속도로가 열어주는 봄은 거시적이고 순간적이어서 개나리의 노랑은 미친 노랑, 산수유의 노랑은 따뜻하고 쓸쓸한 노랑, 생강나무의 노랑은 점잖고 몽실몽실한 노랑, 산벚들은 불쑥 불쑥 건네는 꽃다발이라네, 하며 그저 주절저절 봄 타령하며 달린다.


벚꽃 예쁜 길. 선원2리 주민 정연수씨가 왕벚나무 600주를 기증하여 조성된 길로 4.8㎞ 이어진다.

벚꽃 예쁜 길. 선원2리 주민 정연수씨가 왕벚나무 600주를 기증하여 조성된 길로 4.8㎞ 이어진다.

◆ 자호천변 곰들덤 공원


임고면소재지 지나 선원2리가 시작되는 양항교 남단 자호천변에 '곰들덤' 공원이 있다. 임고면과 자양면을 거쳐 화북면까지 32.9㎞를 '벚꽃100리길'이라 부르는데, 그 초입이다. '곰들덤' 공원은 무료 캠핑장으로 이름나 있고, 봄 벚꽃 성지로 또한 알려져 있다. 양향교 너머 서편으로 이어지는 둑길 역시 벚나무 길로 '벚꽃 예쁜 길'이라는 이름의 포토존이 있다. 선원2리 주민 정연수씨가 왕벚나무 600주를 기증하여 조성된 길이라고 한다. '곰들덤'에도 '벚꽃 예쁜 길'에도 꽃이 피었다. 꽃봉오리도 꽃도 모자람 없다. "이번 주에 다 필 것 같네요. 날 좋으면." 한 아저씨가 무심히 말씀하시고 한 여인이 연신 환호의 탄성을 내지른다.


'곰들덤'은 구전되어온 명칭이다. 영천시에서는 조선 후기 '정유형'이라는 유학자가 쓴 시를 바탕으로 '곰바위 절벽'이라 해석한다. 공원에 그의 시판이 하나 서 있는데 앞면에는 '웅암에 거주하다(居熊巖), 뒷면에는 '웅암에 머물다(留熊巖)'라는 시가 적혀 있다. '웅암'이 곰바위다. 자호천 건너 우뚝한 벼랑을 바라보면 납득이 쉽다. 정유형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찾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는 이곳에 머물기도 했고 살기도 했던 모양이다. 한 문장이 마음에 든다. '조용한 마을 재미는 시절경치 볼만하여/ 나그네 근심 모두 잊고 백발로 앉아 있네.' 또 다르게는 '곰들이 놀던 들판'이라는 풀이하기도 한다. 물가에 곰들이 서 있다. 아. 가만 보니 곰이 셋, 호랑이가 홀로다. 물고기를 쥐고 진지한 얼굴로 가위바위보 중이다. 승자는 없다.


천변에 늘어선 나무는 느티나무다. 벚나무는 둑길 바로 아래에서 터널을 이룬다. 꽃 아래 이미 텐트가 여럿이다.

천변에 늘어선 나무는 느티나무다. 벚나무는 둑길 바로 아래에서 터널을 이룬다. 꽃 아래 이미 텐트가 여럿이다.

둑길 오른편에는 벚꽃, 왼편은 복사꽃이다. 둑길의 개쑥갓과 봄까치꽃과 광대나물과 꽃다지는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둑길 오른편에는 벚꽃, 왼편은 복사꽃이다. 둑길의 개쑥갓과 봄까치꽃과 광대나물과 꽃다지는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천변에 늘어선 나무는 느티나무다. 벚나무는 둑길 바로 아래에서 터널을 이룬다. 꽃 아래 이미 텐트가 여럿이다. 접이식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막 도착한 이들은 텐트를 펼치느라 분주하고, 자호천은 신난 듯 흐르고, 물새들은 바쁘게 움직인다. 둑 사면 언저리에서 개쑥갓의 노란 꽃과 씨앗을 감싼 동그란 솜털을 본다. 자세히 오래 본다. 코가 간질간질 하다. 봄까치꽃과 광대나물은 어디서건 함께하기로 약속한 모양이다. 냉이꽃과 꼭 닮은 노란 꽃은 꽃다지다. 높직한 둑길의 가운데건 가장자리건 지천인 것은 겨울을 지낸 달맞이꽃의 뿌리잎이다. 방석처럼 납작하게 펼쳐져 있어 방석잎이라 부른다. 겨울을 견디느라 붉은 반점이 생겼나, 나는 봄을 견디느라 뾰루지가 났는데.


둑 저편은 과수밭이다. 분홍 꽃은 복숭아, 푸르스름하리만큼 흰 꽃은 자두다. 봄날의 과수 꽃들은 언제나 알쏭달쏭하지만 지금은 확실하다. 잘생긴 농부에게 물어 보았으니 명백하다. 복숭아꽃은 도화(桃花), 우리말로 복사꽃, 무릉도원은 영혼의 안식처, 자두꽃은 이화(李花), 우리말로 오얏꽃, 그리고 오얏꽃은 대한제국의 문장, 이런 생각이 흘러간다. 작은 싹이 보일 듯 말 듯해 아직 헐벗은 나무는 사과다. 늦봄에 꽃이 피어날 것이다. 과수밭의 가장자리에는 호두나무와 밤나무와 으름덩굴이 늦잠을 자고 두릅나무의 어린 순은 하늘을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임고성당 평천공소. 과거 공민학교 건물로 보라색 지붕이 눈에 띈다. 만개한 벚꽃과 지붕이 어우러진 풍경이 알음알음 이름나 있다.

임고성당 평천공소. 과거 공민학교 건물로 보라색 지붕이 눈에 띈다. 만개한 벚꽃과 지붕이 어우러진 풍경이 알음알음 이름나 있다.

임고성당 주차장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 요셉 상이 있다. 성 요셉과 아기예수의 머리위에 꽃잎이 내려앉은 듯하다.

임고성당 주차장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 요셉 상이 있다. 성 요셉과 아기예수의 머리위에 꽃잎이 내려앉은 듯하다.

◆ 평천공소, 임고성당, 임고서원


선원2리에서 길 따라 바로 이어지는 마을은 평천리다. 자호천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평야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마을이다. 길 가에 식당이 많이 보이고 들고나는 차들도 잦다. 슬금슬금 달리며 어느 집 대문 앞에 피어난 박태기꽃과 명자꽃을 본다. 옛날 영화 같은 장면이다. 집들이 띄엄띄엄해질 무렵 단층에 보라색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아담한 건물을 발견한다. 임고성당 평천공소다. 건물은 과거 공민학교 건물이었다고 한다. ​내부는 밝다. 격자무늬 창에는 듬성듬성 한지가 붙어 있어 내부의 명암이 한층 부드럽다. 설교단에 성경책이 펼쳐져 있다. 신도석을 바라보는 자리다. 성당이나 교회를 여러 곳 다녀 봤지만 보라색 지붕도, 이처럼 펼쳐진 성경책도 처음이다. 마당에는 아주 품이 넓은 벚나무 고목이 있다. 나무아래 민들레는 점점이 피었는데, 벚꽃은 이제 시작이다.


임고성당은 임고면소재지인 양항리에 자리한다. 임고서원과 임고초등학교 사이다. 원래 1886년 매호리에서 공소로 시작됐고, 1889년에 평천으로 옮겼다가 1961년에 지금의 자리로 오면서 임고와 평천 두 개의 공소가 되었다. 그러다 1998년 임고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었고 평천공소를 관할하게 되었다. 주차장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 요셉 상이 있다. 머리위에, 옷자락에, 벚꽃 잎이 화관처럼 내려앉았다. 아, 아니다. 칠이 벗겨진 거였네. 가까이 가지 말걸 그랬다. 임고성당은 개나리와 벚꽃과 오얏꽃과 산벚에 둘러싸여 있다. 현재의 건물은 2003년에 지은 것으로 성당 내부는 한옥을 닮았다. 창이 세살창이고 천장은 연등천장과 비슷하다. 성가대석과 작은 건반악기는 유럽식으로 고풍스럽다. 오르간인가. 원목 롤탑 브레드 박스처럼 도로록 안으로 말리면서 열고 닫히는 덮개를 가졌다. 이곳에도 신도석을 마주보며 책이 펼쳐져 있다. 구약과 신약을 합해놓은 책 같다. 성당 마당의 성모상 뒤로 임고서원의 조옹대가 보인다. 구름 때문인지, 꽃 때문인지 아슴푸레하다.


임고성당의 성모상 뒤로 임고서원의 조옹대가 보인다. 구름 때문인지, 꽃 때문인지 아슴푸레하다.

임고성당의 성모상 뒤로 임고서원의 조옹대가 보인다. 구름 때문인지, 꽃 때문인지 아슴푸레하다.

서원의 고요한 엄숙함 가운데에도 봄은 아우성이다. 서원 경역 곳곳에 벚꽃, 산수유, 조팝나무, 목련, 미선나무, 능수벚꽃 등이 피어있다.

서원의 고요한 엄숙함 가운데에도 봄은 아우성이다. 서원 경역 곳곳에 벚꽃, 산수유, 조팝나무, 목련, 미선나무, 능수벚꽃 등이 피어있다.

조옹대에서 본 임고성당. 종탑 너머 높이 솟구친 나무들은 임고초등학교 교정의 플라타너스, 느티나무, 히말라야삼나무 등의 수목들이다.

조옹대에서 본 임고성당. 종탑 너머 높이 솟구친 나무들은 임고초등학교 교정의 플라타너스, 느티나무, 히말라야삼나무 등의 수목들이다.

임고서원이 아슴푸레한 것은 벚꽃과 산수유와 조팝나무와 목련과 미선나무와 다섯 그루 능수벚꽃이 너무 환해서다. 정원의 담벼락 아래에는 제비꽃 무리가 청신하다. 서원의 고요한 엄숙함 가운데에도 봄은 아우성이라 사람들의 걸음이 날듯하다. 조옹대에 올라 임고성당을 내려다본다. 벚꽃들이 웅성웅성 성모님을 감춘다. 성당의 십자가 종탑 너머 더 높이 솟구친 나무들은 임고초등학교 교정의 수목들이다. 보건소 옆구리에 딱 붙어 마치 엿보는 사람처럼 임고초등학교의 운동장을 본다. 거기에는 백년이 넘은 플라타너스와 9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80년이 넘은 히말라야삼나무가 있다. 한 번도 잊지 않았고, 다시 왔으므로, 기쁘다. 봄날의 임고에서는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또 저기로, 자꾸만 오고 가고 또 가고 정신없이 오고 또 간다. 꼭 봄날의 꿀벌처럼.


글·사진=류혜숙 전문기자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20번 대구포항고속도 북영천IC에서 내린다. 영천방향으로 우회전해 직진, 오미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영천방향 28번 국도를 타고 직진, 임고교차로에서 좌회전해 69번도로 포은로를 타고 간다. 양항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임고면소재지다. 임고파출소 지나 길 좌측으로 임고서원, 임고성당, 임고초등학교가 차례로 자리한다. 면소재지에서 다시 69번 도로로 나와 자호천 따라 조금 가면 양항교 건너 바로 왼편에 곰들덤공원 주차장이 있다. 길 따라 북향하면 선원2리 바로 윗마을이 평천리다. 평천초등학교 직전 왼편에 평천공소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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