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풍요로운 문화도시 산소카페 청송] 4. 청송 한지장과 옹기장

  • 박관영·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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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6-24 20:20  |  수정 2025-06-24 18:18  |  발행일 2025-06-24
“돈 벌려면 이 일 못하죠”…전통옹기 4대·한지 7대째 맥 이어

■진보면 진안리 청송옹기장

故 이무남 옹기장 이어 아들이 가업 계승

잿물 발라 장작가마에 굽는 전통방식 고수

경북도 무형유산 지정…32살 조카에 전승

■파천면 송강리 청송한지장

故 이자성 기능보유자 부인·자녀 맥 이어

의성 산불 덮쳐 공방 건물 등 불에 타 막막

주문제작 차질에 굼자 떠날까 노심초사

누군가 "당신 누구요?"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한다. 이름을 대기도 하고, 직업이나 용건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누구 엄마, 아빠'라고 하기도 하고, 드물게는 "아무도 아닌데요"라고 대답할 때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하고 질문한다면, 이런 대답들은 빈 껍데기처럼 보이거나 핵심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민을 계속할수록 나의 일부분만 가리키는 오답들의 미궁에 빠져 들어 마침내 "아무도 아닌데요"가 정답으로 여겨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하나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숱한 오답들을 보며 "아! 여기에도 내가 있었구나, 내 안에 이것도 있었구나"하고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그 오답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물학적 유전자의 발현이거나 내가 속한 사회가 전승해온 '문화적 유전자'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오답들의 집합이 정답에 가장 근접한 답일 터이다.


청송옹기장의 옹기들. 숨 쉬는 그릇인 전통옹기는 특히 발효음식 숙성과 보관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청송옹기장의 옹기들. 숨 쉬는 그릇인 전통옹기는 특히 발효음식 숙성과 보관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청송옹기 전시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옹기를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린다면, 청송한지 체험을 하며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 작은 방의 손가락 구멍 뚫린 문종이를 떠올린다면, 그 순간 청송옹기와 청송한지는 그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가 청송 출신도 아니고 오색점토를 주물러 보지도 못했고, 닥나무를 알아보지도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형유산들은 '나'의 일부분이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소중한 것들이다.


청송한지장과 청송옹기장은 1990년대에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지금은 경상북도 무형'유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지난해 5월 국가유산기본법이 시행되면서 '문화재'가 '국가유산'으로 바뀌었고, 국가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분류체계도 변경됐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도입된 '문화재'라는 용어는 '재물(財·property)'이라는 의미가 강해 기능·예능과 자연(천연기념물, 명승)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어왔고, 지금은 '유산(遺産· heritage)'이라는 용어가 유네스코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치에는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을 넘어, 사유재산이라는 측면보다 공동체의 유산이라는 쪽에 방점을 둔다는 의미가 있다. 즉 과거 외형적 보존과 관리에 치중해온 행정을 선조들이 남긴 역사, 철학, 인물, 사건과 같은 폭넓은 가치를 국민들이 향유하는 방향으로 넓혀 가고, 개인 차원에서 전승하기 어려운 무형유산과 자연유산에 대한 지원과 관리를 강화하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청송옹기장 이호섭 전승교육사가 물레를 돌리며 옹기를 만들고 있다. 부친인 고(故) 이무남 옹기장에게 기술을 배워 이어오고 있다. 이호섭 전승교육사는 큰 조카에게 부친에게 받은 것들은 전해줄 것이다.

청송옹기장 이호섭 전승교육사가 물레를 돌리며 옹기를 만들고 있다. 부친인 고(故) 이무남 옹기장에게 기술을 배워 이어오고 있다. 이호섭 전승교육사는 큰 조카에게 부친에게 받은 것들은 전해줄 것이다.

◆청송옹기장


진보면 진안리 청송옹기 작업장을 찾아 4대째 옹기장을 이어오고 있는 이호섭(53) 전승교육사를 찾아갔다. 물레를 돌리며 옹기를 만들고 있던 그는 이제 다 돼 가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우리는 작업장 입구 쪽 의자에 앉아, 건너편 어둑한 곳에서 천천히 말라 가고 있는 옹기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제가 어릴 때는 흙 만지고 밟아주고, 여기가 놀이터였지요. 그때는 아버지가 일 하는 사람 두 명씩 데리고 했는데, 세 사람이 만들어 놓으면 그 뒷일이 많아요. 그걸 도와주면서 자연히 옹기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군대 가기 전에 벌써 일을 얼추 다 배웠습니다."


이호섭 전승교육사의 부친 고(故) 이무남 옹기장은 고향 상주에서 옹기를 굽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생 전통옹기를 고집스레 지키고 아들에게 물려준 그는 2021년 세상을 떠났다. 청년 시절 그는 고향을 떠나 진보읍 진안리로 옮겨 왔다. 이 지역에서 나는 오색점토가 옹기 만들기에 최고의 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 부근에 옹기 만드는 집이 10여 군데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만 남았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생활양식이 변하면서 옹기 수요가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통방식을 그대로 옹기를 만들고 있는 공방은 많지 않다. 숨 쉬는 그릇인 전통옹기는 특히 발효음식 숙성과 보관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양봉업자 중에 꿀단지로 전통옹기를 사용해본 사람은 옹기를 고집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청송옹기장 이호섭 전수교육사가 옹기를 확인하고 있다. 전통방식으로 만든 옹기는 틀로 찍어 화학약품을 발라 가스 가마에서 구운 옹기보다 내구성과 품질에서 훨씬 우수하다.

청송옹기장 이호섭 전수교육사가 옹기를 확인하고 있다. 전통방식으로 만든 옹기는 틀로 찍어 화학약품을 발라 가스 가마에서 구운 옹기보다 내구성과 품질에서 훨씬 우수하다.

시중에 유통되는 옹기들 중에는 틀로 찍어내 화공약품을 발라 900℃ 정도의 가스 가마에 7~8시간 구워내 까맣고 반질반질한 제품이 많다. 전통방식으로 만든 옹기에 비해 가격은 60~70% 수준이지만 내구성과 품질에서는 그 이상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전통방식 그대로 만든 잿물을 발라 가마에 굽습니다. 장작을 때서 1천100℃ 정도 올라가면 흙이 익기 시작하고, 1천200℃까지 올려서 최소한 4시간을 끌어야 잿물이 녹아 반들반들해 집니다. 작은 가마는 6일 정도 걸려요. 그 옆에 큰 가마는 옛날에 큰 독을 많이 구울 때 썼는데 사람이 최소 6명은 있어야 됩니다. 시간도 한 보름 정도 걸려요. 이제 큰 독을 찾는 사람도 없고 일할 사람도 없어서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큰 가마는 한 번도 안 썼네요."


이제 이무남 옹기장의 기술과 정신과 삶의 이야기는 막내인 이호섭 전승교육사로 이어졌다. 그는 2년 전에 옹기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서른 두 살의 큰 조카에게 자신이 받은 것을 전해줄 것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그대로 이어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거기에는 그 자신의 삶의 흔적이 더해져 있을 것이다.


"돈 벌려고 하면 이 일 못합니다. 그래도 전통은 이어 가야지요. 이을 사람이 없어서 대가 끊기는 공방도 많은데 조카가 와서 다행입니다. 옹기는 종류도 다양해서 일 배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이제 나름대로 옹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마흔까지는 다 배우겠지요."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작업장에 들어올 때면 한 번씩 아버지가 물레 앞에 앉아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와 나눈 얘기도 한 사람과 나눈 얘기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송 한지장 경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고(故) 이자성 기능보유자. 7대째 청송한지의 전통을 이어왔다.

청송 한지장 경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고(故) 이자성 기능보유자. 7대째 청송한지의 전통을 이어왔다.

◆청송한지장


지난 3월25일 저녁 파천면 송강리에 있는 경북도 무형유산 청송한지장 공방으로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이곳까지 번진 것이다. 한두 시간 만에 공방, 주택, 창고 등 6동의 건물과 설비가 모두 불에 탔다.


청송 한지장 작업.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감곡마을은 참닥나무가 많고 물이 좋아 오래전부터 종이 만드는 마을로 유명했으며, 1920년대까지 20여 가구가 한지를 생산했다

청송 한지장 작업.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감곡마을은 참닥나무가 많고 물이 좋아 오래전부터 종이 만드는 마을로 유명했으며, 1920년대까지 20여 가구가 한지를 생산했다

파천면 신기리 감곡마을은 참닥나무가 많고 물이 좋아 오래전부터 종이 만드는 마을로 유명했으며, 1920년대까지 20여 가구가 한지를 생산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리창 보급, 장례 간소화 등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한지수요가 급감하자 차례로 문을 닫고, 경북도 무형유산 지정을 받은 고(故) 이자성(1950~2023) 기능보유자의 집안만 7대째 청송한지의 전통을 이어왔다.


이자성 보유자의 부친 대에 감곡마을 아래쪽 용전천 강변으로 옮겨 한지공방을 이어가다, 1980년대 임하댐이 들어서면서 송강리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이자성 보유자의 부인인 김화순(77) 전승교육사, 딸인 이규자(49) 이수자가 청송한지의 맥을 잇고 있다. 공직에 있는 아들도 한지제조 기술을 전수받아 전수장학생 지정을 준비하고 있던 중 산불로 공방과 부속시설이 전소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청송한지는 흰 종이만 만들어왔는데 대부분 미술, 서예관련 대학과 동호회 등이 구매를 해갔다. 작가들 마다 원하는 종이의 무게나 특성이 달라 거기에 맞춰 주문제작을 해왔고, 또 서책 복원 작업을 위한 종이도 함수율을 그에 맞춰 제작했다.


2018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전통한지 업체가 1996년 전국에 64곳 있었으나 2018년에는 21곳만 남았다고 한다. 수요는 점점 줄어들고 기능을 익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무형유산은 가족 말고는 전승할 사람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어받을 가족이 없으면 대가 끊기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도 청송한지장은 자녀들이 이어받았지만 난데없는 산불이 그 길을 가로막은 사태가 벌어졌다.


한지뜨기 작업을 하는 청송 한지장 고(故) 이자성 기능보유자의 생전모습.지금은 이자성 기능보유자의 부인인 김화순 전승교육사, 딸인 이규자 이수자가 청송한지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한지뜨기 작업을 하는 청송 한지장 고(故) 이자성 기능보유자의 생전모습.지금은 이자성 기능보유자의 부인인 김화순 전승교육사, 딸인 이규자 이수자가 청송한지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이규자 이수자는 "공방만이라도 빨리 복원을 해서 청송한지를 이어 가야 하는데 오랫동안 종이를 만들지 못해 구매자들이 떠나고 청송한지의 맥이 끊길까 봐 가장 걱정"이라고 했다.


지난 3월 의성에서 시작된 경북지역 대형산불이 청송한지장 공방까지 덮쳤다. 불은  공방, 주택, 창고 등 6동의 건물과 설비를 모두 태웠다.

지난 3월 의성에서 시작된 경북지역 대형산불이 청송한지장 공방까지 덮쳤다. 불은 공방, 주택, 창고 등 6동의 건물과 설비를 모두 태웠다.

청송한지 공방과 전시장이 있던 자리는 이제 공터가 됐다. 그 바로 뒤 가파른 산비탈에는 키 큰 참나무들이 서 있었다. 둥치는 검게 그을렸으나 꼭대기 쪽에는 새로 돋아난 초록색 잎들이 제법 수북했다. 참나무껍질이 제 몸을 그을면서, 땅속에서 물을 찾는 뿌리와 하늘에서 빛을 찾는 잎의 연결통로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큰길로 나오니 "어두운 시간도 지나갑니다. 희망을 품고 청송군과 함께 이겨냅시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글=김광재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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