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 계명시민대학 강사, 미술학 박사
트리에서 반짝이는 꼬마전구가 귀엽다. 제대 위에는 대림절을 알리는 초가 켜졌다. 촛불 앞에 선 한 숙녀가 성가를 부른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듯한 손짓이 절도 있다. 결연한 손끝의 노래가 성당 안을 채운다. 수화였다. 교우들이 그녀의 손동작을 따라 합창하던 지난 성탄절 풍경이 또렷하다.
대림절이 되면 성당에는 보라색 초가 켜진다. 이어서 연보라색과 분홍색, 흰색 초에도 불이 켜진다. 기다림과 희망, 준비와 회개, 기쁨과 깨끗함을 상징하는 촛불이다. 제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이 켜진 풍경 속에 있노라면 왠지 그 불빛처럼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할 것만 같다. 다양한 초가 불을 밝히는 대림절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깨어 있음에 대한 다짐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준비의 시간이기도 하다.
하루만 지나면 다시 성탄절이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방식은 요란한 장식보다 온정 나눔이 더 어울린다. 서로에게 한 걸음 다가가 손 내밀 때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귀한 시간이다. 누군가는 습윤해진 마음을 말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오래 아팠던 상처를 치유 받을 것이다. 성탄절이 특별한 이유는 이러한 풍경 앞에서 우리를 잠시 멈춰 세우기 때문이 아닐까. 고요하고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이 지나가면 그 자리에 다시 일상의 풍경이 펼쳐진다.
풍경은 본래 경치와 전망을 뜻하는 말이다. 서양미술사에서는 17세기에 이르러 풍경화가 독립된 장르로 자리 잡았다. 서양의 풍경화가 '바라봄'이라면 동양의 산수화는 '호흡'에 가깝다. 서로 다름이 외경의 묘사만으로는 풍경을 다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풍경은 사람에게서도 그려진다. 손짓과 눈빛, 말 없는 침묵 속에도 스며든다. 표정이 빚어내는 풍경이야말로 가장 짙고도 현실적인 풍경이 아닐까.
대구 문화예술계를 주시한 칼럼 '인사가 만사'를 읽으니 성탄절을 앞두고 들떴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뒤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이 말이 오늘 우리 현실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쿼터리즘이 만연한 시대다. 생각은 짧아지고 행동은 빨라졌다. 투쟁이 일상이 된 시대일수록 성탄은 우리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말한다.
성탄절 풍경은 멀리서 바라보는 화려한 불빛이 아니다. 진짜 성탄절의 모습은 우리가 조금 더 관대해졌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에 가깝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줄 때 세상은 보다 더 살만한 현실 풍경을 그려낼 것이다.
서영옥 <계명시민대학 강사, 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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