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은우진 새마을문고중앙회대구시지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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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26 06:00  |  발행일 2025-12-25
은우진 새마을문고중앙회대구시지부 이사

은우진 새마을문고중앙회대구시지부 이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힘은 제도보다 사람의 마음에서 먼저 나온다. 이 문장은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관통하는 정서이자, 연말연시에 우리가 자연스레 마주하게 되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우리는 걸음을 늦추고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을 떠올리며,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은 아닐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김초엽의 소설 속 인물들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춰 서고, 남겨지고,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앞서 달리기보다 서로의 곁에 남는 선택을 한다. 이 소설이 건네는 위로가 요란하지 않은 이유다. 마음을 알아보는 자리에서 비롯된 위로는 꾸밈없이, 그러나 오래 남는다.


이 느린 시선은 자연스럽게 오늘의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속도를 미덕으로 삼아온 사회의 이면에는 여전히 계층 간 격차와 단절이 존재한다. 고령화로 노인 인구는 늘고, 한부모 가정과 아동 등 일상 가까이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아무리 제도와 기술이 정교해져도, 이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데려오는 일은 제도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그 간극을 메우는 힘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현실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자원봉사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봉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누군가를 완전히 구해내지 못하더라도, 곁에 머무는 선택 자체가 이미 의미가 된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의 짐을 대신 들어주는 일처럼, 사소한 행동 하나가 하루의 온도를 바꾼다.


경상버스 719번을 운행하는 김영훈 기사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교통약자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고, 연말이면 산타클로스 복장으로 승객들에게 웃음을 건넨다. 계산된 친절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기에, 그 온기는 오래 남는다. 소설 속 '느린 연대'가 현실의 풍경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봉사는 특별한 조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부유해야만 가능한 일도 아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의 행동이 또 다른 참여를 부르고, 그렇게 변화는 확산된다. 김초엽의 소설이 말하듯, 빠르게 가는 것보다 함께 늦어지는 선택이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 그 느린 걸음 속에서 사회는 조금씩 온기를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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