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희의 쉰셔널지오그래픽] 나는 어서 할머니가 되고 싶다

  • 서상희 크레텍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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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2-27 06:00  |  발행일 2026-02-27
최진실 주연의 MBC 드라마 질투. 1990년대 히트작이다. <MBC 드라마>

최진실 주연의 MBC 드라마 '질투'. 1990년대 히트작이다. <MBC 드라마>

"넌 대체 무얼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 눈앞에 서 있는데."


최진실을 따라 편의점에서 난생 처음 컵라면을 먹어봤다. 깜찍한 멜빵 스커트를 입고 머리띠를 하고 편의점 창가에서 라면을 먹으면 내게도 영호 같은 남자친구가 생기는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혼자 만날 딴 생각하는 애' 쯤이었다.


청순가련형 첫사랑의 아이콘 강수지. 이런 미디어 속 여성들을 보며 흉내내기에 바빴던 것이 고작 내 청순이었음을 고백한다. 이제는 예쁠 필요 없는 튼튼한 할머니가 목표다. <유튜브 캡처>

청순가련형 첫사랑의 아이콘 강수지. 이런 미디어 속 여성들을 보며 흉내내기에 바빴던 것이 고작 내 청순이었음을 고백한다. 이제는 예쁠 필요 없는 튼튼한 할머니가 목표다. <유튜브 캡처>

그 시절 내게 눈이 삔 한 남자애는 날 보고 강수지를 닮았다 했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자기네 과 파티에 나를 초대했는데, 재수가 없으려니, 우리 과 퀸카가 오는 바람에 무면허 강수지는 바람을 세게 맞았다. 모든 남자애는 그 퀸카를 쳐다봤고, 그녀는 그 파티장을 끝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근면주의자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끈기 있게 틈새시장도 노려봤다. 그러나 기대도 잠시, 정적이 사라졌다고 한 번 꺼진 거품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냉혹한 시장의 법칙이라니.


이제 연애에 대한 꿈을 접고, 코카콜라 광고의 심혜진처럼 멋진 재킷을 입고 마이 잡(my job), 즉 전문직 여성이 되어보기로 했다.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겠구나. 학교 앞에 세워둔 봉고차에 올라 타 거금을 들여 취업영어 세트를 샀다. 수십 개월 할부 계약을 해버렸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 결국 사기였다.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안고 경찰서를 찾았다. 당시 형사님 왈 "학생, 세상 공부 많~이 해야겠다!"


뭔가 그럴싸하면서 되지 않던 일들, 하려고만 들면 재수 옴 붙던 나날들, 바로 내 청춘이었다. 언제나 내 안이 아닌 외부를 향해 좇았으며, 질투를 버무려 남을 부러워했다. 미디어에 나온 모습을 따라하면 그 시대의 트렌드 세터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일장춘몽, 즉 나비의 꿈과 같았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환상체가 나를 품은 것인지, 나 혼자 세상의 틀에 맞춰 자꾸 헛스윙을 날린 것인지 알 수 없다. 돌직구 한 번 못 날려보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그렇게 마흔을 넘겼다. 여전히 속은 '영 부실한 년'인 채로 말이다. 뭐든 악착같이 챙기고 덜 양보하는 쪽이 내 타선의 유일한 비책이랄까.


아이슬란드 마을. 빙하를 보러 가던 길에 눈폭풍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떴다. <본인 촬영>

아이슬란드 마을. 빙하를 보러 가던 길에 눈폭풍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떴다. <본인 촬영>

그렇게 편의점 앞 행사용 풍선처럼 살던 어느 날, 돌직구 한 방을 맞는 일이 있었다. 아이슬란드를 여행할 때였다. 빙하를 보러 가던 길에 눈폭풍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떴다. 초행길이던 나는 어찌할지 몰라 도로변 휴게소로 들어가 티비 앞으로 갔다. 옆에는 같이 일기예보를 보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여행자의 모양새로 보였으며 뉴욕에서 왔다고 했다. 내가 무섭다고 하자 "어서 근처의 숙소부터 예약하라"고 했다. 나는 이미 예약해둔 숙소의 경비를 날리지는 않을까부터 걱정했다. 이런 알뜰한 민족정신이라니. 할머니는 "당신은 지금 그걸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여기서는 차가 뒤집히지 않고 100미터라도 가는 게 행운이니 어서 가장 가까운 숙소로 대피하라"고 했다. 어플을 열자 근처 숙박이 정말 빛의 속도로 차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 인터넷 강국의 국민답게 현란한 손놀림으로 예약을 마쳤다. 출발하려 휴게소 문을 열었는데, 무슨 원시공룡이 쳐들어올 듯 굉장한 굉음이 들려왔다. 혼자 남겨진 그녀가 걱정됐다.


"당신은 어디로 갈 건가요?"


"나는 여행 경험이 많아요. 걱정 말아요."


"이런 엄청난 소리와 바람은 처음이에요."


"위도가 높은 쪽의 폭풍은 소리가 더 큽니다. 이럴 때 움직여야 해요. 차 밑으로 바람이 지나갈 테니 맞서지 말고 몰아요."


"무서워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걱정 말아요. 신이 그대에게 가호를. 굿럭."


눈폭풍이 오는 아이슬란드 바닷가. 자연의 위력은 인간을 외롭게도 하지만, 서로를 연결하게도 한다. 저 마굿간에 들어가는 말들처럼 당신 또한 이 밤 내내 무사하시라는 기도를 타국의 할머니에게 받자 기댈 줄만 알던 연약함이 사라지고 내 속의 진짜 힘이 솟았다. 혼자서도 꿋꿋하게, 당신처럼 강하게. <본인 촬영>

눈폭풍이 오는 아이슬란드 바닷가. 자연의 위력은 인간을 외롭게도 하지만, 서로를 연결하게도 한다. '저 마굿간에 들어가는 말들처럼 당신 또한 이 밤 내내 무사하시라'는 기도를 타국의 할머니에게 받자 기댈 줄만 알던 연약함이 사라지고 내 속의 진짜 힘이 솟았다. '혼자서도 꿋꿋하게, 당신처럼 강하게'. <본인 촬영>

남들은 내게 '여자 혼자 어찌 여행을 가나'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이름 모를 땅에서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2019년 아이슬란드 비크 항구에서 '굿럭'을 빌어주던 그녀의 기도를 믿기로 했다. 마치 이후로도 내내 나를 지켜주는 듯 푸근하고 강인하게 남아 있다.


살아온 세월이 보이는 얼굴, 어떤 과학적 데이터보다 정확한 통찰력, 수많은 밤을 건너온 고뇌의 깊이로 만들어진 주름, 눈동자와 흰자의 경계는 흐려졌지만 결정적 순간에 빛을 내 사람에게 건네는 온기, 나는 이를 '할머니'라 명명한다.


청산도 슬로우길을 걸으며 만났던 할머니 추모 시. 소설가 윤성희는 할머니는 늙은 것이 아니라 층과 격이 있는 것이라며, 우울했다가 귀엽기도 하고 여러모로 입체적인 존재라고 했다. <본인 촬영>

청산도 슬로우길을 걸으며 만났던 할머니 추모 시. 소설가 윤성희는 "할머니는 늙은 것이 아니라 층과 격이 있는 것"이라며, 우울했다가 귀엽기도 하고 여러모로 입체적인 존재라고 했다. <본인 촬영>

젊은 날에는 늘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고 증명하고 싶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빨리 달리고, 더 멋지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지배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진정한 강인함은 불필요한 경쟁에서 벗어나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도 대가 없는 행운을 빌어주는 사랑 가득한 상태라는 걸 말이다.


얼마 전 다시 읽은 알래스카 인디언 설화 '두 늙은 여자'는 내게 그런 생각을 더 단단히 새겨줬다. 추운 겨울, 종족의 이동과 보존을 위해 버려진 두 여성 노인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살아남는다. 동토에서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고, 물고기를 잡아 가둬 양식을 저장한다. 그들을 버리고 떠난 육체만 강한 젊은 것들은 이동 중 태풍을 만나 아사 상태가 된다. 집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할머니는 먹을 것을 내어준다. 이 인디언 설화 속에서 할머니는 생존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었다. 원망하기보다 받아들이며, 죽음에 직면해서도 인간이 할 바를 또렷이 알았다. 할머니란 존재가 강한 진짜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마음이 늙어가길 바란다. 근원을 알 수 없던, 결코 알 필요도 없던 방황과 불안을 멈추고, 더 이상 무엇이 되기도 바라지 않는다. 어떤 꼴을 보든 이해가 가고 화나지 않는다면,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는 징표겠지. 지혜롭고, 포용력 있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따뜻한 온도를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면 참 행복하겠다. 육체적 쇠락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영성의 문으로 들어서는 축제일 테니 말이다. 따라서 이제는 지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인류로, 나는 어서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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