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식 구시가 서쪽에 형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식 구시가지.
튀르키예식 구시가 서쪽에는 19세기 이후 형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식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그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단연 '예수성심 대성당'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큰 가톨릭 대성당으로, 19세기 말에 건축됐다.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을 모델로 한 신고딕 양식의 건축물로서, 2개의 높은 첨탑과 아름다운 장미창이 있어서 마치 유럽의 유서 깊은 고딕 양식 성당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수성심 대성당.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큰 가톨릭 대성당이다.
성당 앞 광장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이 서 있다. 교황은 재임 기간 중 보스니아의 평화를 260회 이상 언급했을 정도로 이곳에 큰 애정을 보였다.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7년 4월에는 직접 사라예보를 방문해 이 광장에서 화해와 용서, 평화를 호소했다. 이에 사라예보 시민들은 종교를 초월해 그의 뜻을 기리고자 2014년 4월 교황의 성인 시복을 기념해 이 동상을 건립했다.
이곳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전쟁의 상처를 상징하는 '사라예보의 장미'이다. 내전 당시 포격으로 인해 도시 곳곳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포탄이 떨어진 콘크리트 바닥에 장미 모양의 파편 흔적을 남겼다. 사람들은 이 슬픈 자국을 '장미'라고 부르며, 희생자들의 붉은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수지를 채워 넣어 당시의 아픔을 추모했다. 예수성심 대성당 광장에도 이러한 붉은 장미 자국이 남아서 전쟁의 참혹함을 상기시켜준다. 사라예보 곳곳에 200송이가 넘는 '장미'가 피어 있다.
예수성심 대성당 광장의 교황 요한 바오르 2세 동상.
대성당에서 서쪽으로 페르하디야(Ferhadija) 거리를 따라가면, 좁은 골목 양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건축된 19세기 서구식 건축들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19세기 말에 세워진 마켓홀 '그라드스카 트르즈니차'이다. 시장이라기보다는 극장에 가까운 외관을 가진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현지 식재료를 판매하는 전통 재래시장으로, 사라예보 시민의 일상과 역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명소이다. 이곳 역시 내전 당시 두 차례나 포격을 당해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북쪽 외벽에는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명판이 설치돼 있다.
해방광장의 다문화 동상. 뒤에 보이는 것이 세르비아 정교회 성모 탄생 대성당이다.
이 길 남쪽에는 작은 공원처럼 꾸민 '해방광장'이 있다. 이곳의 명물은 다문화 동상이다. 공식 명칭이 '다문화 인간이 세계를 건설하다(Multicultural Man Builds the World)'로서, 1997년 이탈리아 작가 프란체스코 페릴리가 제작해 기증한 작품이다. 내전의 비극을 겪은 후, 사라예보의 전통적인 다인종·다문화적 특성을 회복하고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둥근 지구본 위에 나신의 남성이 평화의 상징인 7마리의 비둘기에 둘러싸인 형상이다. 벌거벗은 모습은 인종, 문화, 종교, 국적을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하며, 이는 특정 배경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분쟁을 넘어선 화합을 강조한 상징이다. 주변에 이슬람, 가톨릭, 정교회, 유대교 등의 다양한 종교 시설이 모여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이 동상이야말로 사라예보의 도시 정체성이자 지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광장에 놓인 196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보 안드리치(Ivo Andrić) 동상.
그 옆에는 196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보 안드리치 동상도 있다. 이보 안드리치는 '드리나 강의 다리' '트라브니크 연대기' 등의 작품을 통해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보스니아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동상은 내전 당시 무슬림(보슈냐크인)에 의해 파괴됐다가 복원됐다.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이었던 그의 작품이 무슬림에 대해 부정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는 인식과 그를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었다. 무슬림이 절대다수가 된 지금, 이 동상은 마치 다문화 동상의 보호를 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렇게 내력을 알고 보면 이 도시는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해방광장 옆에는 네오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된 성모 탄생 대성당이 있다. 건축 양식 때문에 언뜻 보면 가톨릭 성당 같지만, 19세기 건설된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이다. 앞서 언급한 바슈차르시야 지역의 16세기 정교회 성당과 구분하기 위해 흔히 '새 세르비아 성당(Nova srpska crkva)'으로 부른다. 이 성당은 사라예보에서 가장 높은 모스크보다 일부러 몇 센티미터 더 높게 지어, 당시 가장 높은 사라예보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현재도 발칸반도에서 가장 큰 정교회 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5개의 돔을 가진 십자형 바실리카 구조가 특징이며, 입구에 금박을 입힌 바로크 양식의 종탑이 유독 눈에 띄었다.
성모 탄생 대성당. 19세기 건설된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이다.
페르하디야 길 서쪽으로 보행자 도로가 끝나면서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식 고풍스러운 건축물의 향연도 끝이 났다. 2차 세계대전 중 사망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 추모비 너머로는 20세기 현대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길 이름도 20세기 유고슬라비아 지도자 이름을 딴 '티토 길'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유럽에선 20세기 건축들이 제일 남루하다.
도심을 돌아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던 장소 '라틴 다리'로 갔다. 사라예보 시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밀랴츠카(Miljacka River) 강에 놓인 아담한 석조 교량이다. 16세기에 처음 놓인 이 다리는 대홍수로 파괴된 후 1798년경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놓였다. 오스만제국 시절, 다리 서쪽에 가톨릭을 믿는 라틴인들의 주거지가 있어서 '라틴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다리 북쪽 끝에서 2차 대전의 불씨가 된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다.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한때 암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영웅시해 다리 이름도 '프린치프 다리'로 불렸으나, 다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현재는 당시 사건을 알리는 작은 안내판만 설치돼 있다. 사건 현장 바로 앞에 있는 '사라예보 박물관 1878-1918'에는 당시 암살 사건을 비롯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통치기의 여러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던 라틴 다리. 건너편에 '사라예보 박물관 1878-1918'이 보인다.
무슨 거창한 계획과 결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건을 재구성해 보면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당시 '남슬라브인의 통일 국가'를 꿈꾸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세르비아계 청년단원 6명이 사라예보를 방문하는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했다. 이들은 황태자의 차가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며 기회를 노렸지만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황태자의 차에 던진 수류탄은 빗나가 엉뚱한 사람들만 다치게 했다. 황태자 부부는 자신들의 건재함을 과시하고자 부상자 병문안을 간다. 그때 근처를 얼쩡거리던 19세의 단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황태자가 탄 차를 발견했고, 엉겁결에 총을 발사해 거사를 성공시킨다. 거사 후 그는 독약을 마시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지만 독약도 듣지 않았고 강물도 얕아서 결국 체포됐다. 여러모로 어설픈 암살자였다.
역사에 우연은 없다지만 이 사건은 몇 가지 우연이 겹쳐서 일어났다. 우선 그는 단원 가운데 가장 왜소하고 병약해 보충병처럼 맨 마지막에 서 있었는데, 하필 황태자의 차가 그 앞을 지나간 것이다. 또 하나는 운전사가 경로 변경에 대한 지시를 전달받지 못해 길을 잘못 들었고, 다시 방향을 돌리기 위해 멈춘 후 서행하다가 총을 맞았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20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종료 약 7개월 전인 1918년 4월에 결핵과 영양실조로 옥중 사망했다.
그는 '남쪽 슬라브인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유고슬라비아 시절,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됐다. 거사 장소인 라틴 다리 북쪽에 그의 발자국까지 새겨 기념했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발흥해 내전을 치르던 1990년대 이후에는 테러범으로 재평가됐고, 그의 발자국도 제거됐다. 내전을 기점으로 영웅에서 테러리스트로 전락한 것이다. 지금도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의 평가가 첨예하게 갈린다고 한다.
이렇게 사라예보 이야기는 전쟁에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 다양한 사람과 문화, 다양한 역사와 종교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양성이야말로 가장 큰 자양분이다. 아팠던 만큼 이 도시 가득 더 크고 아름다운 꽃이 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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