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진 시조시인·대구문인협회 부회장
은행이나 우체국 창구에 가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번호표부터 뽑는다. 예전에는 창구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이 흔했지만, 지금은 번호표 대기 시스템이 그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번호표 한 장만 있으면 누가 먼저 왔는지 따질 필요도 없고, 줄을 지키느라 서 있을 필요도 없다. 단순한 종이 한 장이지만 그 안에는 질서를 만들고 시간을 절약하는 지혜가 담겨 있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문화의 힘이다.
나는 지난 28년 동안 국내외 ISO 심사원(품질, 환경, 안전보건, 정보보안, 식품 등)으로 활동하며 제조업체와 건설현장, 공공기관, 대학교, 서비스 기업 등 다양한 조직을 방문해 왔다. 현장을 다니며 느낀 것은 조직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성과가 좋은 곳일수록 공통적인 점은 잘 갖추어진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을 특정 사람의 경험이나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고, 누구나 같은 기준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매뉴얼과 절차서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요즘 산업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이 '안전'이다. 우리 사회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산업재해에 대해 훨씬 더 엄격한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안전은 단순한 구호나 의지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안전도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ISO 45001 안전보건경영시스템이다. 작업 현장의 위험요인을 미리 파악하고, 안전한 작업 절차를 마련하며, 교육과 점검을 반복하는 체계를 통해 사고를 예방하는 시스템이다.
현장을 살펴보면 사고가 적은 회사에는 특별한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생활처럼 지키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작업 전 점검표를 확인하고, 안전모를 착용하고, 위험요인을 기록하는 일들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는다. 작은 절차 하나를 지키는 습관이 결국 큰 사고를 막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도 이미 많은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자동차를 탈 때 안전벨트를 매고, 횡단보도 신호를 지키며, 병원에서는 예약 순서를 따른다. 이런 작은 질서들이 모여 사회의 안전과 효율을 만들어 낸다.
시스템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이해하고 함께 지킬 수 있는 간단한 규칙을 만들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다. 번호표 한 장이 긴 줄을 사라지게 했듯이 작은 시스템 하나가 우리의 일터와 사회를 훨씬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만들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지켜 나가는 문화다. 시스템을 존중하고 함께 실천하는 시민의식이 자리 잡을 때 우리의 사회는 더욱 안전하고 성숙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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