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욱의 민초통신] “문득 섬광 같은 긍지가 스쳐…”

  •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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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3-30 11:32  |  수정 2026-03-30 11:33  |  발행일 2026-03-31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요즘 문화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그야말로 왁작박작하다. 붐비고 웃고 떠들고 들끓어 흥겹기 그지없다. 소문도 사방팔방 퍼져나가 시끌벅적 들썩이는 게 영락없이 마을 잔칫집 분위기다.


# 도심 속 궁궐 앞 보랏빛 아미


방탄소년단(BTS)의 '컴백 라이브:아리랑'이 그중 압권이다. 서울 중심 광화문 노상에서 펼친, 1시간짜리 밤 공연이 열흘이 지나도 여전히 화제 만발이다. 세계 190개국에 실황 중계(지상파 아닌 OTT지만)되고, 77개국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무려 1천840만 명이 동시에 공연을 보고 즐겼다니, 말 그대로 '글로벌 신드롬'이다.


이 공연은 "단순한 춤 노래가 아니라 가수와 팬덤을 정서적 고리로 '짬맨' 일종의 의식(儀式, ritual)"이었단 표현이 등장했다. "전 지구적 서사 경험을 안겨준 먹먹한 행사"란 찬사도 나왔다. 서울 시각 밤 8시면 미주, 유럽은 새벽~한낮, 모니터 앞에 앉기 어려운 시간이다. 한데도 동시 관객이 그 정도니, "서울이 이젠 세계 공연문화 중심지가 되었다"란 자찬이 '국뽕'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물론 논란도 적잖았다. 현장에 최대 26만이 몰린다고 호들갑 떨었으나 실제 8만(경찰 추산)에 머물렀다. 공공광장 출입을 통제하며 사적 공연장으로 만든 데에 비난도 일었다. 그러나 첨단도시 속 궁궐과 밤하늘을 현란한 레이저와 아미들 보랏빛 물결로 수놓아, 문화 강국 위상을 단숨에 치켜세웠단 찬사가 이를 덮었다. 경복궁, 아리랑 등 한국만의 이미지를 세계에 뽐내 드러낸 공이란 얘기다.


BTS의 이 성과는 작년 여름에 시작, 1년 내내 식지 않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열풍과도 맞물려 있다. 지난 26일 '케데헌'은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받았다. '골든' '소다 팝' 등 삽입곡이 세계 대중음악계를 평정했고, 그 노래 춤 율동은 이 시대 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두어 살 아기들도 곡을 흥얼거릴 정도였으니 그들 수상은 당연하고도 남았다.


#골든, 소다 팝에 빠져든 지구촌


시상식장엔 판소리 가락에 사물놀이패, 도포 자락에 갓 쓴 무용수들이 나와 굿과 탈춤 등 K(한국) 퍼포먼스로 흥을 돋웠다. 출시 90일 만에 사상 최초로 3억 뷰를 넘기고, 세계 70여 개 국제영화제와 음악제에서 100개가 넘는 트로피를 쓸어 담은 전력까지 함께 자랑하는 무대였다. 시상식에 참석한 세계 유명 배우들도 신나게 형광봉을 흔들며 K팝이 이뤄낸 대성취를 축하하는 모습을 보였다.


'케데헌'은 K팝 여성 아이돌 그룹 '헌트릭스'가 악령을 물리쳐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다. 넷플릭스 등 미국 기업의 제작 유통물이지만 글로벌 한인이 대거 참여하고 K-문화 전통을 이야기 뼈대로 삼았다. 극의 주연들은 컵라면과 김밥을 먹고, 목욕탕과 한의원에서 기를 보충하며, 신칼과 노리개 등 치장을 하고 나온다. 검은 도포에 갓 쓴 미남 아이돌 악령, '사자 보이스'도 가히 '전설의 고향'급 캐릭터다.


BTS와 케데헌의 성공 여정은 아직 진행형이다. 엊그제 미국 LA에서 열린 'i하트 라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골든'이 또 한 번 상을 받았다. 골든글로브, 그래미상처럼 '올해의 노래 상'이다. BTS는 4월9일 고양을 시작으로 도쿄, 런던, 멕시코시티, 자카르타, 시드니 등 세계 주요 도시 순회공연에 나선다. 단숨에 400만 장 넘게 팔린 앨범 '아리랑'을 들고서다. 세계가 K팝·K콘텐츠·K컬처 등 한국형 멋 맛, 운(韻)과 율(律)로 물들여진다는 찬탄이 절로 나오는 이유다.


# '왕사남' 슬픔과 한(恨), 해학


이런 도도한 흐름 속에 또 사극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가 흥행 돌풍에 올라탔다. 극장 개봉 50일 만에 관객 1천500만 명을 넘겨 각종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영화는 애초 역사 속 뻔한 이야기를 담았다고 알려져 별 기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극에 담긴 한국적 슬픔과 한, 해학 덕에 입소문을 타더니 금세 한국 영화 전체 흥행 수익 1위, 누적 관객 수 3위로 우뚝 서는 괴력을 발휘했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어린 왕, 단종 이야기는 기실 새로울 게 없다. 600 년 전 그 얘길 감독은 21세기 한국 현대 정서로 살을 붙여 새롭고 상큼한 시대물로 각색했다. 유배지 영월의 촌장과 쫓겨난 소년 왕의 끈끈한 정(情)과 한(恨), 의(義)를 한데 버무려 한국 땅 수려한 산수 위에 펼쳐냈다. '관객으로 극장에 갔다 백성이 되어 나왔다는 식'의 공감 만점의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영화는 요즘 한국인에게 면면히 흐르는 감정선, 보듬기·쓰다듬기 같은 약자의 연대 공생을 보여준다. 서민으로 추락한 왕과 무지렁이 촌 백성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 다가가 서로 안고 희망을 함께 꾸는 과정이 뭉클하게 그려진다. 이런 구도는 BTS가 좌절하려는 청춘에게 '아니, 계속 헤쳐 나가'라고 북돋우는 것(신곡 'Swim')이나 태생 약점으로 '사자 보이스'에 밀리지만 끝끝내 무너지지 않고 일어서는 '헌트릭스'에게서 오롯이 보이는 요즘 한국민의 정서다.


# 박완서 '어른 노릇 사람 노릇'


K팝, 한국 영화 신화가 문화계의 시끌벅적한 뉴스라면 전혀 소리 소문도 없이 은은히 문화 향취를 뿜는 소식도 있다. 15년 전 타계한 작가 박완서의 아카이브가 서울대에 문을 열었고 거기 아이돌 공연 못지않게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박완서라면 전쟁의 상처, 청춘의 단절, 참척의 아픔을 보듬으며 오직 글로 삶을 산 천생의 소설가 아닌가. 서울대인(人) 제 1호 아카이브로 선정된 게 놀랍고 그 발자취를 찾는 사람들이 조용조용 모여 찬미한다는 것도 한국 문화의 새로운 모습인 듯 뿌듯하다.


박 작가는 30년 전 '어른 노릇 사람 노릇' 수필집에 이런 글을 썼다. 하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차장들이 목적지를 외치며 손님을 부르는데 유독 "으악, 으악"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단다. 세상에 별 이름이 다 있다며 다가가 "으악이 어디요?" 물었다던가. 그때 차장의 표정에 '문득 섬광 같은 긍지가 스치고' 이내 씹어뱉듯이 말하더란다. "아아, 토지에 나오는 악양도 몰라요?"


으악은,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 '경남 하동군 악양면'이었던 것이다. 청년은 저런 여자는 무시해도 싸다는 듯 더 거들떠보지 않았으나 박완서는 오히려 짜릿한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단숨에 써내려갔다. "어떤 문학이 그 문학을 낳은 땅 구석구석 이름 없는 촌부의 마음속에까지 드높은 자존심을 심어줄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굉장한, 전율스럽기조차한 일인가!"


이 봄 그 문학, 그 문화를 낳은 땅 구석구석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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