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순의 문명산책] 시누헤의 귀향

  •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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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4-30 10:46  |  발행일 2026-05-01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기원전 20세기, 고대 이집트에 시누헤(Sinuhe)라는 인물이 있었다. 고위 관리로 있던 그에게 파라오 아메넴하트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질서의 중심이 무너졌다는 신호였고, 권력의 그림자가 서로를 삼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시누헤는 이미 도망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겼고, 나일강의 질서에서 벗어나 멀리 사막 너머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인정받았고, 성공하였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늘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늙어버린 그는 결국 돌아온다. 하지만 그 귀환은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묻는 자리였다.


비슷한 구조는 다른 문명에서도 반복된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 이후 오랜 방랑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것은 자신과 세계를 다시 정립하는 과정이었다. 성서의 요셉 역시 타국에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지만, 결국 가족과의 재회, 곧 관계의 복원으로 완결된다. 이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명에서 태어났음에도 하나의 공통된 구조를 이룬다. 인간은 떠난다. 타자의 세계를 통과한다. 그리고 돌아온다. 그러나 그 돌아옴은 출발점으로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이미 변해버린 자신과 세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만남이다.


우리는 대개 인생을 선형적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인류의 오래된 이야기들은 이 단순한 선형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길 위에 있고, 돌아오더라도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고대의 영웅처럼 전쟁이나 신의 명령에 의해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떠난다. 교육을 위해, 일을 위해, 혹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익숙한 세계를 벗어난다. 낯선 도시와 언어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구성한다. 어느 정도 성공하기도 하고, 어떤 것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어느 순간, 우리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진다. 더 이상 확장이나 성취가 아니라, 정리와 안식을 향해서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귀향'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그곳에는 안식이 아니라 낯섦이 기다린다. 분명 돌아왔지만,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다. 시누헤가 그랬듯이, 오디세우스와 요셉이 그랬듯이, 귀환은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낳는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것은 더 이상 역할이나 성취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완성의 언어가 아니라 겹침의 언어다. 젊은 시절의 도시들, 스쳤던 인연들, 지나온 관계들, 선택과 후회의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자신을 이룬다. 노년은 그 모든 층위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시간이다. 더 이상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경계 위에 동시에 서 있는 존재다. 과거와 현재 사이, 떠남과 귀환 사이, 기억과 현실 사이. 우리는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을 증명하려 애썼다. 무엇을 이루었는지, 어디에 도달했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루지 못한 것들, 놓쳐버린 것들, 그리고 끝내 돌아오게 만든 어떤 힘까지 포함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읽기 시작한다. 시누헤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가에 대한 오래된 사유다. 귀향은 끝이 아니다. 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을 하나의 의미로 묶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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