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구미 의구총(義狗塚)·의우총(義牛塚)

  • 박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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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5-02 12:14  |  발행일 2026-05-02
주인을 구하고 죽은 개와 소의 이야기…설화에 그치지 않고 현장 유산으로 이어진 짐승의 충정
각박한 시대에 되새기는 공동체의 가치
라태훈 구미문화원장이 의구총(義狗塚)에 있는 의구도를 설명하고 있다. <박용기 기자>

라태훈 구미문화원장이 의구총(義狗塚)에 있는 '의구도'를 설명하고 있다. <박용기 기자>

구미 시내에서는 숭선대교를 건너 국도 25호선, 선산읍에서는 일선교를 지나 해평면 낙산리 국도변에 들어서면 작은 봉분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의구총(義狗塚)이다. 해평면 낙산리 148번지에 있는 의구총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개(犬) 모습이 그려진 표지판을 보면 누구나 한번쯤 궁금증을 가지고 차를 멈추게 된다. 의구총은 단순히 개의 무덤이 아니라, 주인을 살리고 대신 죽은 황구의 이야기가 봉분과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구미시와 구미문화원에 따르면 400여 년 전 연향(현 해평 낙산리)에는 노성원이라는 우리(郵吏·지금의 우체부)가 살고 있었다. 그의 집에는 유순하고 민첩한 황구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 개는 사람의 뜻을 잘 읽고 주인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노성원이 이웃 마을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월파정 북쪽 길가에서 말에서 떨어져 잠이 들었고, 그 사이 들불이 번져왔다. 황구는 먼저 옷을 물어뜯고 얼굴을 핥으며 주인을 깨우려 했지만, 술에 취한 주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길이 옷자락까지 옮겨 붙을 기세가 되자 황구는 수백 보 떨어진 낙동강까지 달려가 온몸에 물을 적셔 돌아왔고, 다시 불길 속을 뒹굴며 불을 껐다. 수십 차례 같은 행동을 반복한 끝에 결국 불은 꺼졌지만 황구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뒤늦게 깨어난 노성원은 젖은 재와 죽어 있는 황구를 보고서야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과 그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그는 크게 감동해 황구를 관으로 장사지냈고, 후세 사람들 역시 그 자리를 '개 무덤 터'라 부르며 그 의로움을 전했다.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있는 의구총(義狗塚) 모습. 오랜 세월을 알려주듯 봉분 앞 비가 많이 마모돼 있다. <박용기 기자>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있는 의구총(義狗塚) 모습. 오랜 세월을 알려주듯 봉분 앞 비가 많이 마모돼 있다. <박용기 기자>

이렇게 무덤만 있고 의구의 행적이 구전되어 온 것을 1665년 선산부사 안응창(安應昌)은 의열도(義烈圖)에 의구전(義狗傳)을 기록하고 비를 세웠다. 이어 1745년 박익령(朴益齡)이 화공에게 의구도(義狗圖) 4폭을 그리게 해 의열도에 첨부했다. 이후 1952년 도로공사로 훼손돼 한차례 옮겨졌다가 1993년 원래 위치에 가까운 현재 위치로 옮겨졌으며 '의열도'에 있는 '의구도' 4폭을 화강암에 조각해 봉분 뒤에 세우는 등 일대를 정비했다. 봉분은 직경 2m, 높이 1.1m, 의구도는 가로 6.4m·세로 0.6m·폭 0.24m 규모다. 이 외 의구총에 관한 내용은 '일선지', '선산부읍지', '선산읍지', '청구야담', '파수록', '한거잡록', 심상직(沈相直)의 '죽서유고(竹西遺稿)' 등에서도 전하고 있다.


구미시 산동읍 인덕리에 있는 의우총(義牛塚). 의우총 역시 오랜 세월을 알려주듯 봉분 앞 비가 많이 마모돼 있다<박용기 기자>

구미시 산동읍 인덕리에 있는 의우총(義牛塚). 의우총 역시 오랜 세월을 알려주듯 봉분 앞 비가 많이 마모돼 있다<박용기 기자>

이 이야기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낯설지는 않다. 전북 임실의 오수견 이야기가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술에 취해 잠든 주인을 불길에서 구한 충견 이야기로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이외 전국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구미의 의구총은 그 이야기가 실제 봉분과 조각, 현장 유적으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구미의 의로운 짐승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산동면 인덕리에는 의우총(義牛塚)이 있다. 옛 문수점(文殊店, 현 산동면 인덕리) 마을에 살던 김기년은 암소 한 마리와 함께 밭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숲속에서 호랑이가 뛰어나와 소를 덮쳤고, 김기년이 괭이를 들고 맞서자 이번에는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소가 뛰어들어 뿔로 호랑이를 받아냈다. 몇 차례 거센 공격 끝에 호랑이는 상처를 입고 달아났다가 끝내 죽었다. 김기년은 목숨을 건졌지만 상처가 깊어 스무 날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 가족에게 "내가 호랑이 밥이 되지 않고 숨을 이어 온 것은 이 소 덕분이니, 내가 죽은 뒤에 이 소를 팔지 말고, 비록 소가 늙어 저절로 죽더라도 그 고기를 먹지 말고, 반드시 내 무덤 곁에 묻도록 해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소는 주인이 죽던 날 갑자기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날뛰더니 물과 쇠죽을 먹지 않고 삼일째 되는 날 밤 결국 주인 곁으로 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 충정을 기려 의우라 부르고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구미시 해평 의구총(義狗塚) 표지판<박용기 기자>

구미시 해평 의구총(義狗塚) 표지판<박용기 기자>

1630년(인조 8) 선산부사 조찬한(趙纘韓)이 의로운 소 이야기를 듣고 감탄해 '의우총'이라는 비를 세우는 한편 화공에게 의우도를 그리게 하고 '의우도서(義牛圖序)'를 지었다. 봉분과 비가 훼손되어 있던 것을 1993년 의열도(義烈圖)에 있는 의우도 8폭을 화강암에 조각해 봉분 뒤에 세우고 일대를 정비했다. 봉분의 저변 직경은 2m, 화강암에 새긴 의우도의 크기는 가로 6.86m, 세로 0.8m, 너비 0.2m이다.


1994년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된 의구총과 의우총은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봉분 앞 비석 표면이 심하게 마모돼 있었다. 군데군데 파이고 닳아 글자를 또렷하게 읽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오히려 그 흔적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지역의 기억을 보여주는 듯했다.


의우총(義牛塚) 화강암에 새겨진 의우도 8폭<박용기 기자>

의우총(義牛塚) 화강암에 새겨진 의우도 8폭<박용기 기자>

라태훈 구미문화원장은 "말 못하는 짐승조차 은혜를 잊지 않고 의리를 지켰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떤가를 돌아보게 된다"며 "의구총과 의우총은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각박해진 현대사회에 신뢰와 책임, 공동체 정신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구미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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