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추억을 먹고 산다는 것

  • 황새미 달서아트센터 공연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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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5-06 14:38  |  수정 2026-05-07 10:15  |  발행일 2026-05-07
황새미 달서아트센터 공연기획자

황새미 달서아트센터 공연기획자

나이가 든다는 건,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에 익숙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매일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동 같았던 지난날과는 달리, 이제 나의 하루는 꽤 일정한 궤도를 그린다. 집과 회사, 생존형 운동, 가끔 만나는 친구들. 특별할 것 없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이 생활이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기분 좋은 안정감이나, 작은 감사함 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비슷한 궤도를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이 평온한 궤도를 이탈하게 만드는 '기억의 습격'이 찾아온다. 거창한 사건이라기보다 아주 사소한 감각의 자극에서 시작된다. 나에겐 어느 록 페스티벌에서 해 질 무렵 들었던 혁오의 'TOMBOY' 같은 것이다. 수많은 관중 사이에 섞여 있던 나, 핑크빛 노을, 더위가 한풀 꺾인 공기의 온도, 팔 끝을 스치던 기분 좋은 바람. 그 장면은 예고 없이 문득, 아주 선명하게 떠올라 나를 미소 짓게 한다.


분명 이런 기억 때문일 것이다. 공연을 기획하며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공연장은 내게 매일 출근하는 일상의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겐 일생에 몇 번 없는 특별한 장소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혹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큰맘 먹고 찾아온 이들에게 그 경험은 결코 가볍지 않다. 티켓값에는 공연 시간뿐 아니라, 그날을 기다려온 설렘과 공연장까지의 수고로움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좋은 콘텐츠'의 기준은 명확하다. 단순히 화려한 볼거리로 남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뿌리를 내려 훗날 지친 일상을 버티게 하는 '선명한 한 장면'이 돼주는 것. 공연이 끝나고 로비로 나오는 관객들의 상기된 얼굴에서 나는 그 가능성을 읽는다. 그들이 각자의 마음속에 작은 불빛 하나씩을 품고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것은 삶의 고비마다 꽤 괜찮은 위로가 돼줄 것이다.


초심이 흐릿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준비하는 이 공연이 누군가에게 '그날의 노을' 같은 장면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인생에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를 소중한 저녁을 헛되이 소비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하고. 기획이라는 일은 타인의 시간을 정성껏 가공해 특별한 기억으로 되돌려주는 작업이어야 한다.


기획을 통해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만든 공연이 마음 한구석에 다정한 기억으로 남고, 그것이 누군가의 내일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좋겠다. 무채색 일상에 내가 섞어둔 선명한 색깔 하나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오늘도 치열하게 고민하며 공연을 기획하는 작지만 단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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