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은 했지만, 안 갈 수 없었다”…96세 학도병이 꺼낸 75년 전 기억

  • 권기웅
  • |
  • 입력 2026-06-10 18:18  |  수정 2026-09-03 00:31  |  발행일 2026-06-10

정천복 선생, 중3 때 6·25 참전

김석원 장군 연설 듣고 다부동 전투로

"한 사람 생명 살렸다는 마음 지금도 남아"

정천복 선생이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경북교육청 제공

정천복 선생이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경북교육청 제공

"정천복. 96세. 1931년 5월 9일생입니다."


정천복 선생은 자신의 이름과 나이, 생년월일을 또렷하게 말했다. 75년 전 전쟁터로 향하던 때 그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학교를 2년 늦게 들어갔지만, 교실에서 보내야 할 시간은 6·25전쟁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10일 영남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정 선생은 당시 학교생활을 "친구들과 쾌활하고 즐겁게 보냈다"고 했다. 그가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은 순수한 자원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정 선생은 "자의로 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어 "내가 지원한 게 아니고, 결국 지원하긴 했지만 국가의 부름을 받아 갔다"며 "안 가면 안 되게 돼서 그렇게 지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참전의 계기에는 김석원 장군의 연설도 있었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김 장군은 경주 월성국민학교를 찾아 시국 강연을 했다. 정 선생은 "경주는 화랑의 발상지이니 이런 때 화랑의 정신으로 나라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며 "그 말에 감동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정 선생은 대구에 있던 제5교육대에서 일주일가량 군사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뒤 밤에 출동했고, 날이 밝아서야 자신이 도착한 곳이 칠곡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곳은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던 다부동 전투 현장이었다.


전쟁터의 기억 중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는 장면은 한 인민군 의용군을 생포한 일이다. 정 선생은 "인민군 보급부대를 공격했는데 의용군 한 사람을 생포했다"고 했다. 그는 그 일을 단순한 전과로 기억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생포되지 않았다면 유엔군 공격을 받아 죽었을 겁니다. 나로 인해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는 것이 뿌듯합니다. 생포했다기보다 그 생명을 살렸으니까요."


정천복 선생. 경북교육청 제공

정천복 선생. 경북교육청 제공

정 선생은 1·4후퇴 때 제주도로 이동했다. 훈련소가 제주도로 옮겨지면서 그는 조교로 차출됐다. 이유는 학력 때문이었다. 당시 중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 선생은 "중학교라도 나왔기 때문에 조교로 차출됐다"고 했다. 그가 가르친 대상은 학도병이 아니라 하사관학교 교육생들이었다. 정 선생은 "고참병들이 하사관학교로 갔고, 그래서 내가 하사관학교 교장 훈장을 받았다"고 말했다.


정 선생의 증언은 학도병이 단순히 전투에 동원된 소년병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중·고등학생들은 지역사회에서 비교적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이었다. 이들은 전투뿐 아니라 조교, 연락, 문서, 통역 보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을 감당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분명했다. 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말을 꺼냈다. 그는 '見危授命(위기수명·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과 '見利思義(견리사의·이로움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를 말했다.



기자 이미지

권기웅

어려운 사실은 쉽게, 불편한 진실은 날카롭게 전하겠습니다.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회인기뉴스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