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서] 대구의 대한광복회

  • 우대현 광복회 대구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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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7-02 10:14  |  발행일 2026-07-03
우대현 광복회 대구시지부장

우대현 광복회 대구시지부장

1915년 7월15일(음력), 200여 명의 우국지사들이 대구 달성 토성에 모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국권을 빼앗긴 지 불과 5년,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계몽과 교육, 외교 활동에 주력하던 때에 대한광복회는 항일무장투쟁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는 단순한 비밀결사가 아니라 독립전쟁을 준비한 군사조직이었으며, 이후 무장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선구적 단체였다.


대한광복회는 대구에 본부를 두었다. 곡물상점으로 위장한 상덕태상회를 거점으로 삼아 전국 8도는 물론 만주 길림에까지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총사령 박상진을 중심으로 김좌진, 채기중, 서상일, 김한종, 우재룡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참여하여 조직을 이끌었다. 이들은 친일부호 처단, 군자금 모집,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 등 실질적인 독립전쟁 준비에 힘을 기울였다.


대한광복회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독립의지를 행동으로 옮긴 데 있다. 이들은 단순히 독립을 염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권 회복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였다.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뒤, 무력으로 국권을 되찾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는 훗날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등 여러 무장독립운동 세력의 활동으로 이어졌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같은 항일무장투쟁의 정신적·조직적 기반이 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조직이 와해되고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국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들이 남긴 공화(共和)정신과 독립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광복회 투쟁은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및 민주공화제 채택으로 이어졌고, 이후 광복군 창설과 독립전쟁의 역사 속에 살아 숨쉬었다. 우리는 오늘의 민주공화제 대한민국이 이러한 선열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진 나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대한광복회 결성 당시 지도부에서 활약하신 백산 우재룡 지휘장의 장남으로서, 광복회 대구지부장으로서 대한광복회에 대한 남다른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선친과 동지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나라는 오늘날 자유롭고 번영된 대한민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역사와 정신이 충분히 조명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쉽다.


특히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대구는 대한민국 무장독립운동의 중요한 발상지임에도 그 역사적 가치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제는 대한광복회의 업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하며, 기념사업을 확대하여 후손들에게 올바르게 전승해야 할 때이다. 선열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를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미래 세대에게 나라 사랑의 가치를 전하는 일이다.


광복 80년이 지난 오늘, 대한광복회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공화정을 앞서 내세운 대한광복회의 이념과 사상은 우리의 정신적 자산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 개인의 안위를 넘어 공동체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선열들의 책임의식과 희생정신은 우리 사회가 계승해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대한광복회가 꿈꾸었던 공화제와 자주독립의 이상을 기억하고 선양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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