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독립운동가의 길②] 계급의 벽을 허문 태백산 호랑이, 의병장 신돌석<상>

  • 이지용·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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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7-29 18:38  |  발행일 2026-07-30
신분의 벽 넘은 평민 의병장, 구국의 칼 뽑고 태백산맥 종횡무진

1896년 만 18세에 의병 첫발 내디뎌

고종황제의 해산령 이후 전국 떠돌아

손병희·박상진 등 뜻있는 이들과 교류

1906년 고향마을에서 영릉의진 거병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복디미마을의 의병장 신돌석 장군 생가.  남쪽에는 축산천이 흘러 바다로 가고, 그 너머에는 고래산이 우뚝 가파르다. 이곳에서 1878년 음력 11월3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태어났다.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복디미마을의 의병장 신돌석 장군 생가. 남쪽에는 축산천이 흘러 바다로 가고, 그 너머에는 고래산이 우뚝 가파르다. 이곳에서 1878년 음력 11월3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태어났다.

집은 초가, 남향의 네 칸 집이다. 집은 마을의 다른 집들과 떨어져 외따로 덩그러니 자리한다. 남쪽에는 축산천이 흘러 바다로 간다. 그 너머에는 고래산이 우뚝 가파르다. 영덕 축산면 도곡리 복디미마을, 이곳에서 1878년 음력 11월3일 신돌석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석주(申錫柱), 어머니는 분성김씨로 2남 2녀 중 셋째였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순경(舜卿), 호는 장산(壯山), 본명은 태호(泰鎬)다. '돌석'은 그의 아명이었다.


◆덩치 크고 힘 센 소년, 의병이 되다


신돌석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신'씨는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은 성이다. 고려시대 명문거족이었던 그의 집안은 조선조에 들어와 벼슬길이 막혔고 7대조 때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한미한 평민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신석주는 건실하게 가산을 모아 비교적 넉넉했다고 전한다.


어린 시절 신돌석은 이웃 상원마을에서 강학하던 육이당(六怡堂) 이중립(李中立)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스승 이중립은 신돌석을 제자로서 매우 아꼈다고 한다. 육이당의 아들 이병국이 훗날 신돌석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만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한 동네 한 서당에서 친구로서 어릴 적부터 나의 아버님의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였는데, 그의 체격이 세고 기질이 호탕하고 활달하여 지도하기가 어렵게 보였으나 그의 마음이 명민하고 국량이 넓고 힘이 뛰어나니 아버님께서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인정하고 깊이 공부하게 하였다.'


그는 한시를 읊을 정도로 꽤 공부를 한 편이었고, 체격이 장대하고 담용이 뛰어나 항상 소년들의 대장이었다 한다.


1895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은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 일본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등은 의병 봉기의 기폭제가 되었고 1896년 봄에 이르러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확산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림 조직의 본거지인 삼남 일대가 가장 격렬했다.


신돌석은 이때 의병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그의 나이 만 18세였다. 이때의 활동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다. 그는 안동의진 소모장 유시연의 동지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신돌석이 대소백 사이에서 다시 일어나다'라는 기록도 있다. 대소백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하락 의진과 영해의진 등이 연합해 싸운 영덕 남천숲 전투에도 참여했다. 전투에 패하고 김하락 장군이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한 후에도 잔존한 동지들과 함께 간헐적인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얼마 뒤 고종황제의 명으로 의병이 해산될 무렵 홀연히 사라졌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상원마을에 있는 육이당. 어린 시절 신돌석은 이웃 상원마을에서 강학하던 육이당(六怡堂) 이중립(李中立)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상원마을에 있는 육이당. 어린 시절 신돌석은 이웃 상원마을에서 강학하던 육이당(六怡堂) 이중립(李中立)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생명을 걸고 전투를 벌였던 날들, 수많은 희생을 눈앞에서 지켜본 순간들, 그 이후에 닥쳐온 충격과 분노와 공허는 깊고 컸을 것이다. 신돌석은 전국을 떠돌았다. 그리고 뜻있는 지사들과 교우했다. 함께 공부했던 이병국은 이 무렵의 신돌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세상이 어려운 때이니, 나라를 두루 다니며 왜적을 청소하겠다는 의지를 가졌으며, 집안의 생업을 돌보지 않고 뛰어난 인물을 찾아 동맹을 맺고 마땅한 전략을 세우는데 힘썼다.'


당시 신돌석이 만난 인물들은 손병희, 박상진, 민긍호, 이강년 등이었다. 특히 박상진과는 의형제처럼 지냈는데 시사를 논하다가 먹고 자는 일마저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돌석은 1902년 또는 1903년에 결혼한 듯하다. 부인은 축산리 출신의 청주한씨 한재여다. 당시로서는 늦은 결혼이었다. 전국을 떠도느라 결혼 적령기를 놓친 탓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었다고 의관을 차려입고 다니다가 스승 이중립의 동생 이성화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평민이라는 신돌석 집안의 신분을 말해주는 일화다.


결혼 후에도 그의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903년 여름 청도를 지나다가 전신주를 뽑아 왜군 공병을 무찔렀다고도 하고, 부산항에서 배를 수리하는 일본인들을 바위 끝으로 끌고 가 떨어뜨리고 배를 전복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박상진의 집이 있던 울산 송정에서는 돌다리와 디딜방아를 혼자 힘으로 놓았고 축지법을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04년 신돌석은 평해의 월송정에 올라 우국(憂國)이라는 시를 남겼다.


'루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고/ 낙목에 가로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솟는구나!'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 땅 전체가 전쟁에 휘말려 고통 받고 있을 때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대한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상원마을 뒤로 고래산이 보인다. 고래산은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군사훈련을 했던 곳이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상원마을 뒤로 고래산이 보인다. 고래산은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군사훈련을 했던 곳이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1906년 음력 3월, 신돌석은 복디미 마을 앞 주막에서 거병했다. 영릉의진(寧陵義陳)이다. 의진에는 농민, 포수, 천민들이 대거 참여했고 양반 출신도 여럿이었다. 당시 의병장은 대부분 유림 출신이었다.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었음에도 신분사회의 장벽을 뛰어넘어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인물들을 부하로 확보하고 있었다. 동지는 100명이라고도 하고 300명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일본군경의 기록에 의하면 거병 전반기 영릉의진은 300명 선이다. 아버지 신석주는 전답 등 가산을 처분하여 무기와 군량을 구입하는 등 의병활동을 지원했다.


해방 후 기록된 신돌석 관련 자료에 따르면 '대장은 자기 재산으로 무기를 사고, 자기 집 양곡으로 군량을 충당했는데 이보다 앞서 의장의 아버지 석주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직접 100여 섬을 가져왔다가 끝내는 아들의 의병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았다. 좋은 집과 옥토도 아까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릉의진은 상원마을 숲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거병한 곳에서 멀지 않은 축산천변 숲이다. 또 가파르게 솟아 있는 고래산 중턱에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펼쳤다. 훈련을 시작한 상원마을 숲은 최근 하천 공사 도중 파괴되었는데 수백 년 된 거목들이 뿌리째 뽑혔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전기 의병으로서 전투 경험을 쌓았고, 세상을 떠돌며 지사들과 사귀었던 신돌석 장군은 이제 정국의 동향을 이해하고 나아갈 방향에 대한 시각을 갖춘 인물로 성장해 있었다. 영릉의진은 영양, 청송, 울진, 평해, 영해, 영덕, 울진, 봉화 등지에서 전투를 전개했고 일본군과의 초기 전투에서 연달아 승리했다. 일제에 큰 타격을 준 신돌석은 '평민출신의병장'으로 널리 알려져 전국적으로 주목 받았다. 패주하던 왜군은 도곡리를 지나며 그의 집을 불태웠다. '이곳이 신돌석의 집이다!' 그때 신씨 집안의 집 수십 채가 함께 불탔다 한다.


항일투쟁 동안 신돌석은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장악했다. 민중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확보하는가 하면 탄알을 만들기 위해 납으로 된 어망의 그물추를 수집하기도 했다. 양반가문의 지원도 받았다. 자료에 따르면 '의장 자신의 재산이 바닥난 뒤 남에게 글을 보내니 살림이 넉넉한 자들이 호응하였으며 도처에 미리 통문을 내어 부하들에게 약탈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안동의 이상룡은 1만 5천금이나 되는 거금을 내놓았다. 퇴계 종가도 1907년 불태워졌는데, 그 이유가 영릉의진을 지원했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영양 주실의 조만기 등이 고문당한 것도 같은 이유다. 영릉의진은 양반가문의 지원을 바탕으로 의병들의 옷을 짓고 음식을 조달해 일반 농민들에게 피해를 거의 입히지 않은 것으로도 존경받았다.


신돌석은 태백산맥을 동서로 넘나든 게 몇 차례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일월산과 백암산, 검마산 등의 골짜기를 방향도 없이 돌파했고, 영해와 영덕을 중심으로 삼척 남부에서 경주 북쪽까지 휩쓸고 다녔다. 신출귀몰하고 축지법을 쓴다는 말이 도처에 나돌았다. 사람들은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 했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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