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뤄둔 일 하러·독서하러…밤에 카페서 모이는 직장인들

  •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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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10-03 09:56  |  발행일 2026-10-03
대구 중구 유락커피로스터스에서 진행하는 모여서 각자 밤샘 작업 모임. 밤새 각자 할 일을 하고, 작업물을 소개하며 서로 잘 모르는 분야를 알아가는 것이 취지다. 유락커피로스터스 인스타그램

대구 중구 유락커피로스터스에서 진행하는 '모여서 각자 밤샘 작업' 모임. 밤새 각자 할 일을 하고, 작업물을 소개하며 서로 잘 모르는 분야를 알아가는 것이 취지다. 유락커피로스터스 인스타그램

'모각작'. 모여서 각자 밤샘 작업. 밤새 작업하고 얘기하는 모임이 지난달 5일 대구 중구에서 열렸다. 동인동 유락커피로스터스에서 열린 이 모임은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는 참석자들이 모여 밤새 각자 할 일을 하고, 작업물을 소개하며 서로 잘 모르는 분야를 알아가는 것이 취지다. '어드민 나이트'가 트렌드로 뜨며 모임은 어느덧 20회를 훌쩍 넘겼다. 개발자, 디자이너, 영화감독, 의사, 스타트업 대표, 상담사 등 다양한 이들이 왔다 갔다.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어드민 나이트'가 하나의 자기계발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늦은 오후 시간대에 카페·스터디룸·공유오피스 등 한 공간에 모여 각자 해야 할 잡무를 처리하는 모임이다.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은 비교적 적고 혼자 할 때는 부족한 집중력과 생산력을 높일 수 있어 호응을 얻는다.


'어드민 나이트'는 관리·행정을 뜻하는 '어드민(Administrative)'과 '밤(Night)'을 결합한 신조어다. 저널리스트 크리스 콜린이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기고한 칼럼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다. 칼린은 "현대인이 겪는 과부하가 고립감을 심화하고, 자잘한 잡무들이 우리를 화면 속에 가둬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며 한 공간에서 함께 잡무를 처리하는 모임을 제안했다.


지난달 대구 출신 크리에이터 시골쥐가 커피 프랜차이즈 투썸플레이스와 함께 진행한 퇴근 후 야자: 투썸X시골쥐 야간 자율 학습 행사. 투썸플레이스 제공

지난달 대구 출신 크리에이터 '시골쥐'가 커피 프랜차이즈 투썸플레이스와 함께 진행한 '퇴근 후 야자: 투썸X시골쥐 야간 자율 학습' 행사. 투썸플레이스 제공

◆같이, 따로의 매력…2030 사이서 직업군 불문하고 확산


핵심은 '같이, 따로'다. 모르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 모여 약간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할 일을 해치우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모이지만 주된 목적이 할 일이기에 나를 꾸밀 필요 없이 편하게, 값비싼 식당이 아닌 카페 등에서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진행하면 된다. 원래 개발자들 사이에서 주로 이뤄지던 모임이지만 이제는 직업군을 불문하고 확산하는 중이다.


키워드 분석 플랫폼 블랙키위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어드민 나이트'의 검색량은 12.5%로 집계됐다. 이 중 73.9%가 정보 검색을 목적으로 키워드를 입력했고, 20대와 30대의 합산 비중은 무려 85.7%에 달했다.


"지금부터 1교시 시작하겠습니다." 대구 출신 크리에이터 '시골쥐'(류채우씨)는 커피 프랜차이즈 투썸플레이스와 함께 지난 8월 '퇴근 후 야자: 투썸X시골쥐 야간 자율 학습' 행사를 열었다. 시골쥐 역시 이번 행사의 출발점을 최근 유행하는 '어드민 나이트'에서 찾았다. 어드민 나이트에 2030 세대가 학창 시절 경험한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콘셉트를 입혔다. 남이 짜준 시간표 대신 각자가 '오늘 끝낼 일'을 정해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함께 집중하도록 했다. 투썸플레이스도 저녁 시간대 카페 이용과 디카페인 수요가 늘고 있어 행사 방식이 잘 맞아떨어졌다.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뉴욕포스트는 지난 1월 어드민 나이트에 대해 "생산성을 사교 활동으로 재해석한 사례"라고 평가하며 "미루기 쉬운 일상 업무를 해치울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주는 모임이 SNS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크리에이터 시골쥐와 투썸플레이스가 함께 기획한 퇴근 후 야자: 투썸X시골쥐 야간 자율 학습 행사. 최근 유행하는 어드민 나이트의 일환이다. <투썸플레이스 제공>

크리에이터 '시골쥐'와 투썸플레이스가 함께 기획한 '퇴근 후 야자: 투썸X시골쥐 야간 자율 학습' 행사. 최근 유행하는 어드민 나이트의 일환이다. <투썸플레이스 제공>

◆'느슨한 연대' 만족도 높아…신상 공개 안 하고 생산성 높여


참가자들의 만족도는 높다. 그동안 친목 모임은 이름부터 직업·나이 등을 소개하고, 식사와 술·대화에 시간을 할애해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드민 나이트는 공통의 목적만 공유한 채 가볍게 모였다 헤어지면 된다. 모임 다수는 이런 취지에 맞게 신상을 공개하지 않게 하고 참가자들은 서로 이름 대신 닉네임을 정해 부른다. '느슨한 연대'를 지향하는 요즘 라이프 스타일과 맞닿아 있다.


대구 중구 삼덕동에 지난달 문을 연 죽은 시인의 사회. 낮 12시부터 자정까지 운영되는 이곳은 아늑한 분위기에서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대구 중구 삼덕동에 지난달 문을 연 '죽은 시인의 사회'. 낮 12시부터 자정까지 운영되는 이곳은 아늑한 분위기에서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모임의 형태는 다양해지고 있다. 자유롭게 각자 할 일을 하는 모임부터 공통의 관심사를 함께 즐기는 모임까지 제각각이다. 후자의 경우 독서, 글쓰기, 영화 감상은 물론 시험 등 목표를 정해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퇴근 후 글쓰기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김지원(28·대구 북구)씨는 "당근에서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구해 모임을 만들었다. 평일 저녁 퇴근 후 만나 같은 주제로 글을 쓰고 감상만 나눈 뒤 헤어진다"며 "친목 모임으로 변질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이름과 직업, 나이 등 개인 정보는 공유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배경을 모르는 채 글이라는 관심사 하나만으로 만나는 방식이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고 했다.


지난 3월부터 '어드민 나이트' 모임을 즐기고 있다는 최승원(35·대구 수성구)씨도 "서로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생산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혼자 있었다면 미뤘을 일을 집중해 하게 된다"고 했다. 이어 "관계 유지에 신경 쓰지 않고 모임이 끝나면 원래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니 오히려 오래 참여할 수 있다. 음주나 큰 지출도 없어 가성비가 좋은 듯하다"고 웃었다.


유락커피로스터스 역시 "나란히 밤을 새우면 별거 안 했는데도 이상한 전우애 같은 게 생긴다"며 "그게 또 모각작(모여서 각자 밤샘 작업·어드민 나이트 모임)의 매력일 것"이라고 전했다. 모각작의 경우 전국 각지에서 참여 문의가 들어오고 관련 콘텐츠는 154만회의 조회수가 나온 적도 있다.


◆전문가 "1인가구 늘수록 모임 더욱 증가할 것"


이 같은 '밤 문화'가 뜨며 늦은 시간까지 작업하기 좋은 문화공간도 늘고 있다. 대구 중구 삼덕동에 지난달 문을 연 '죽은 시인의 사회'는 책·LP음악과 함께 커피·칵테일 등을 즐길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다. 낮 12시부터 자정까지 운영되는 이곳은 아늑한 분위기에서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 인근에 위치한 '일상환기'는 사색과 개인 작업을 위한 무인 북카페다. 100% 예약제로 운영되는 만큼 조용한 분위기를 지향해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새벽 3시까지 이용 가능하다. 셀프바의 커피와 차는 무료로 제공된다.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 인근에 위치한 일상환기. 사색과 개인 작업을 위한 무인 북카페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대구 중구 경상감영공원 인근에 위치한 '일상환기'. 사색과 개인 작업을 위한 무인 북카페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어드민 나이트' 유행에 대해 문화평론가들은 관계에 대한 부담은 줄이면서도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소극적 욕구가 반영된 현상으로 분석했다. 하재근 평론가는 "인간관계 맺기를 다소 부담스러워하고 술자리 갖는 것도 소극적인 젊은 세대지만 관계 자체에 대한 욕구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라며 "관계 맺기 자체에 몰입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만큼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소극적인 사회관계 맺기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김헌식 평론가는 "1인가구가 늘어날수록 언제 어디서든 자신들의 취미와 목적에 맞게 만나고 흩어지는 유연한 모임이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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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문화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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