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체육팀 임훈 차장
지난주 연차를 내고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아들의 가을 운동회에 다녀왔다. 학교까지 걸어가는 내내 수십 년 전 나의 운동회 풍경이 빛바랜 필름 사진 같은 모습으로 떠올랐다.
기자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니 그때는 '국민학교'였다. 1980년대 경북 오지의 국민학교 운동회는 그야말로 온 동네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전교생이 100명 남짓하던 조용한 시골 학교였지만, 운동회날만큼은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한창인 시절이라 그랬을까? 작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펼쳐지던 곤봉 체조 등의 매스게임도 기억에 남는다. 저학년 학생들은 한복을 차려입고 무용을 추곤 했는데, 당시 기억으로는 국제대회 개막식 부럽지 않은 장관이었다. 단거리 달리기 결승선에선 온 힘을 다해 달려온 아이들 손등에 1·2·3등 도장을 찍어주고 공책 한 권씩을 안겨줬다.
청군과 백군으로 나눠 콩주머니를 던지던 박 터뜨리기는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였다. 먼저 박을 터뜨린다고 별다른 이득을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머리 위로 떨어질 색종이 꽃가루를 기대하며 환호하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공책 몇 권과 과자 몇 봉지가 고작이던 학교 앞 구멍가게 주변도 그날만큼은 장날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보따리 장사꾼들이 좌판에 가득 풀어놓은 로봇이나 화약총 장난감들은 무려 500원 또는 천원이라는 큰돈을 쥔 아이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 시절 운동회는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솥에 육개장을 끓여내던 어머니들과 약주 한잔씩 걸치며 동네 아이들의 성장을 함께 응원하던 어르신들까지, 지역사회 전체가 하나 되는 화합의 장이었다.
한참 세월이 지나 마주한 요즘의 운동회는 '아재'의 눈으로 보기에 예전만 못하다. 21세기에 '쌍팔년도' 촌동네 운동회의 정취를 찾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넘치는 활력만큼은 예전과 다름없다. 달리기 조에서 1등을 했다며 마치 금메달이라도 목에 건 것처럼 자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마주하니,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런데 그날 운동장에서 유독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뜻밖의 풍경이 있었다. 한창 열띤 응원전이 펼쳐지던 순간이었다. 당연히 자기 학교나 '청군' 또는 '백군'을 외칠 줄 알았던 아이들의 입에서 느닷없이 익숙한 구호가 터져 나왔다. "최강 삼성. 최강 삼성"
학교 이름 대신 '최강 삼성'을 연호하는 아이들이 절반을 훌쩍 넘겼다. 대구경북이라는 지역 사회의 일상에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가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 새삼 실감한 순간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단 한 번도 팀명과 연고지를 바꾸지 않은 전통이 그 원인일 수 있겠다 싶었다. 부모 세대부터 40년 넘게 이어진 지역 연고 구단에 대한 애정이 초등학교 운동장 한복판에서 증명되는 장면이었다.
운동회 사회자 선생님의 입에서 "삼성 말고 학교 이름을 외쳐 주세요"라는 요청까지 나왔는데 그때부터 기자는 다시 현실로 복귀했다.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교차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자가 영남일보 체육팀에서 담당 중인 삼성 라이온즈는 아쉽게도 정규시즌 2위에 자리했다.
10개 구단 중 2위이니 당연히 칭찬을 받을 법하지만 팬들의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다. 삼성이 마지막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때가 2014년이다.
올해의 '가을야구'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나의 가을 운동회처럼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길 기대한다.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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