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추억기행 .42] 대중문화의 뒤안길<15>

  • 입력 2003-08-28 00:00  |  수정 2023-03-27 10:05  |  발행일 2003-08-28 제1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1950년대 초 KBS 성우 출신으로 특히 라디오 정치 드라마에서 이승만 대통령 역을 잘 소화해냈던 한국 성우 1세대 구민(현재 미국에 거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한 대사 한 구절이다.

‘천의 목소리’를 가졌다고 하는 성우. ‘라디오 듣던 시절’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귀하신 몸’이었다. 시사풍자물 ‘오발탄’의 오성룡, 17년 역사를 갖고 있는 MBC라디오(96.5mh) ‘격동 50년’ 해설자 김종성(60·TBC 성우 1기생으로 현재 사단법인 성우협회 이사장), 맥가이버 붐을 일으킨 배한성(TBC 2기생으로 현재 교통방송에서 활동중), FM방송 명DJ 김세원(TBC 성우 1기생), ‘전설따라 삼천리’의 유기현(작고), ‘김삿갓 북한 방랑기’의 오정한(KBS성우로 현재 미국에 거주)…. 이들 모두 한국을 대표하는 성우들이다.

현재 한국에는 600여명의 성우가 있다. KBS에 320여명, MBC 120여명, EBS 56명, CBS 17명, 투니버스 32명, PBC에 7명이 포진해 있다. 하지만 이들중 극소수만이 성우의 고유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극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 현재 국내 라디오 방송 드라마는 방송 3사를 합쳐 고작 2편, ‘MBC격동 50년’, 매주 일요일 오후 8시에 방영되는 ‘KBS라디오극장’밖에 없다. 이젠 성우들도 방송극 분야만 고집해선 먹고 살기 힘들어 오디오 북, PC게임, 만화영화, 광고 분야로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40여년 전 성우들로선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서울 KBS가 54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공채 1기생 성우를 모집한다. 이어 60년 현재 탤런트로 활동 중인 송재호와 전운이 부산 MBC 성우 1기생으로 들어온다. 지역 성우의 역사는 60년 10월 대구KBS가 전속성우 1기생 한세훈, 김광남, 선성치, 박은미, 홍성민(64) 등을 공채하면서 본격화된다. 첫 방송된 드라마는 김태유(62∼65년 한국연극협회경북지부장) 연출 이석정 작 ‘젊은 학도의 수기’. 이 무렵 방송극은 대부분 반공극, 역사극, 순수애정물이 주류를 이룬다.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난 1기생 한세훈은 라디오 방송극 ‘삼현육각’, TV드라마 ‘아버지와 아들’ 등 100여편의 작품에 출연, 차세대 연기자로 장래가 촉망됐지만 80년 중반 40대의 나이로 이승을 떠났다. 대구 출신의 선성치는 MBC 대구 편성부장, SBS편성부국장을 역임했고 MBC 인기 드라마 ‘왜그러지’ 등에 출연한 홍성민은 76년 MBC특채탤런트로 상경한다. 61년에는 고령 출신으로 경북대 수의과를 졸업한 인기 탤런트 신충식을 비롯해 박일, 오영심, 박선미, 이연숙(교통사고로 작고), 안현주, 김계봉이 2기생으로 들어온다. 63년 3기생으로 김경호(65), 탁원제, 이숙자, 이경자 등이 뽑혔다. 김경호는 70년대 중반부터 MBC 라디오 시사만평 코너 달구벌 만평 초창기 진행자(현재는 홍문종)로, 탁원제는 69년 서울 TBC성우로 활약하다가 80년 언론통폐합으로 친정인 KBS로 원대복귀한다. 65년 김지원, 김추명(시인) 등이 4기생으로 가세한다.

67년 5기생 공채시험은 그 어느때보다 경쟁이 치열했다. 경쟁률은 무려 100 대 1. 시험 당일 1천여명의 응시생이 KG홀에서부터 대구역을 지나 태평로 상가까지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시험에서는 방송과 방송극 관련 지식, 음성 테스트, 대사분석력 등을 종합평가했다. 바늘구멍을 뚫고 김삼일(61), 전영치, 안대용(현재 KBS탤런트), 정수봉, 시옥희, 오현 등 9명이 HLKG 성우용 배지를 달게 된다. 63년 포항KBS 전속 성우 1기로 활동 중에 응시한 김삼일은 현재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실장 이필동과 함께 지역 연극계의 양대 기둥 역할을 해왔다.

포항 출신의 김삼일은 63년 12월 포항시 항구동에서 극단 은하를 창단한데 이어 지역 성우, 재야 연극인 청구·대구대학생들과 함께 극단 태백산맥을 결성, 창단공연작으로 빅토르 A, 크라보첸코 원작, 한세훈 연출의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를 연습, 한달여간 경북도내 순회공연을 했다. 이때 김삼일은 주인공 크라보첸코 역, 현재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실장 이필동이 스튜팽코 역을 맡았다. 김삼일은 69년부터 대구KBS 기자, 아나운서, PD 등을 거쳐 98년 KBS대구방송총국 보도국 취재부장을 물러났고 현재 대경대학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방송생활 중에도 연극활동을 지속, 85·89년 전국 연극제에서 ‘대지의 딸’과 산불을 연출해 대통령상, 연출상, 문공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68년 6기생으로 정영철과 김일근이 들어온다. 정영철은 70년대 상경, KBS드라마 PD로 변신, 현재 드라마 연출 부문의 척추 역할을 하고 있다. 김일근은 성우제도가 없어지자 70년대 대구 CBS 기자로 변신했고 현재 대구 KBS 보도국 편집부장으로 있다.

성우들은 주로 방송 드라마에 출연하는 한편 1년에 3차례 유료 정기공연도 병행했다. 당시 성우들의 자존심은 대단했지만 거의 가난했다. 그래서 연습도 가능한한 점심시간을 피했다. 김삼일은 KG홀 옥상에서 몰래 도시락을 까먹기도 했고 인심좋은 이필동의 어머니는 아들과 단원들을 위해 대봉동에서 KG홀까지 오가며 새참을 져날랐다.

69년 대구 KBS는 예산 문제로 전속 성우제도를 폐지시킨다. 하지만 애청자를 의식해 비공식 드라마는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매주 목요일 오후 8시30분부터 30분간 KG극장(김태유 연출), 매주 화요일 오후 8시30분부터 30분간 주간 방송극 ‘마을의 솔봉이’(새마을 운동 캠페인 성격의 방송극, 출연 성우는 탁원제·정수동 등)가 잠시 존속할 수 있었다. 다음주에는 대구MBC 라디오 시사만평 코너 ‘달구벌 만평’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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