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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 국회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추태를 부렸다. 낮술에 취해 실수를 저질렀다.
술, 특히 폭탄주로 인해 주화(酒禍)에 시달리거나 이로 인해 옷을 벗은 정치인이나 관료들은 부지기수다.
'현대사는 폭탄주의 역사'라고 할 만큼 폭탄주는 본의 아니게 적지 않은 악역을 맡았다. 폭탄주 때문에 국가정책이 바뀌고, 고위관료가 보따리를 싸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엘리트 집단에서는 폭탄주 한잔으로 조직의 단합과 사회의 미래를 논하는 풍습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폭탄주는 현대사에서 '역사의 증인'이 돼 왔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에서도 두 명의 주인공이 마을 술집에서 폭탄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브래드 피트는 형 크레이그 셰퍼를 데리고 도박장에 가서 맥주잔에 위스키잔을 넣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곤 했다. 이런 폭탄주는 서양에서부터 유래된 '보일러 메이커(Boiler Maker)'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온몸을 취기로 끓게 하는 술'이란 뜻으로 맥주와 독주를 섞은 술을 가리킨다. 이러한 폭탄주는 주로 탄광·벌목·부두 노동자들이 즐겼다.
폭탄주는 호주머니가 얇은 서양 노동자들이 싼 술값으로 취하기 위해 마셨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군인·정치인·법조인·경제관료 등 사회 각층 엘리트 집단 전반에서 애용하면서 발전(?)돼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폭탄주가 처음 등장했을까.
1900년대 초 개화기에 막걸리 한 사발에 소주 한 잔을 섞은 '혼돈주'라는 일종의 폭탄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식의 혼합주는 폭탄주라 불리지 않고 혼돈주 또는 '자중홍(自中紅)'이라 불렸다.
현대의 폭탄주가 나타난 시기는 국내산 양주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80년대다. 폭탄주는 무엇이든 빨리 해치우려는 급한 기질 때문에 급속도로 발전, 이제는 당당한 우리나라 술 문화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폭탄주를 가장 애호하는 집단에 검찰도 낀다. 폭탄주 하면 검사를 떠올릴 정도다. 99년 6월 당시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이 대낮에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고 '검찰이 조폐공사의 파업을 유도했다'고 한 말이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검찰사회에서 대낮 폭탄주가 사라지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밤 문화'에서 폭탄주는 여전히 살아있다.
검사들이 폭탄주를 애호하는 이유는 '기싸움' 때문이다. 어느 집단과 만나도 질 수 없다는 오기가 배어 있다. 정신력으로 취기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폭탄주를 마시면서 거악척결(巨惡剔抉)의 전의를 불태운다. 이 때 마시는 폭탄주는 거악에 맞설 용기를 배가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때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잊기 위해 수면제 대용으로 마시는 경우도 있다.
폭탄주에 얽힌 일화도 많다. 경북고 4인방의 폭탄주 얘기는 지금껏 회자된다. 54회(73년 졸업) 졸업생인 서주홍·박윤환·권영석·황보중 검사는 94년 대구지검에서 뭉쳤다. 고교동기 4명이 같은 검찰청에서 근무하는 일도 드물지만, 모두 술을 좋아했다. 서 검사는 마시는 양이 많아서 '서총량', 박 검사는 연일 마시는 데는 당할 사람이 없다고 '박연짱', 권 검사는 하루에 마시는 양으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권당일', 황보 검사는 주량의 한계를 알 수 없을 정도여서 '황보무량'이란 별명이 붙었다. 서울중앙지검 총무부장인 변찬우 검사는 이들과 반대다. 초임 검사시절 후래자삼배(後來者三盃)를 한 뒤 그 자리에서 쓰러져 '변예외'란 애칭을 얻었다. 술을 꺼리는 송광수 전 총장은 상대방이 폭탄주를 마실 때 공기밥 한그릇을 더 먹는 것으로 대신했던 일화도 있다.
술 권하는 사회를 살면서 술은 때론 보약과도 같고 반대일 때도 있다. 아침이슬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고,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 사회 각계층에서 술이 역기능보다 순기능을 많이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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