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遷位 기행 .54] 이정(李禎)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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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7-11   |  발행일 2012-07-11 제20면   |  수정 2012-07-11
글씨 : 土民 전진원
퇴계의 증조부, 문무 겸비한 善吏로 역사에 남다
평안도서 판관 재임때 산성 쌓아 여진족 침략 막아
늘 겸손한 품성에 말타기·활쏘기에도 남보다 능해
20120711
이정이 태어나고 자란 주촌종택(안동시 와룡면 주하1리) 전경. 이정 불천위제사를 지내는 종택 별당 ‘경류정’의 이름을 짓고 당호 편액 글씨를 쓴 이가 퇴계 이황이다.

퇴계 이황의 선조인 이정(李禎)은 세종 때 평안도 영변의 판관(判官)으로 재임하면서 자신의 감독 아래 영변진(寧邊鎭)을 설치하고 약산(藥山)산성을 쌓아 여진족의 침입을 막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선산부사 등을 역임하며 선정을 펼친 인물이다.

이정의 삶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정확한 생몰 연도 역시 전하지 않는다.

이정은 가문의 후손이 중심이 되어 불천위로 모신 인물로, 불천위에 오른 시기(1565년)가 드물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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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이 1435년경 평안도 영변에서 가져와 주촌종택 마당에 심은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호).



◆증손 퇴계 이황이 기록한 이정의 삶

이정의 증손인 퇴계 이황이 남긴 기록(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行 中直大夫 善山都護府使 諱 禎 事錄)을 통해 이정의 삶을 살펴본다. 일부를 제외하고 그대로 옮긴다.

공(公)은 안동부의 북쪽에 있는 주촌(周村)에 살았으며 묘소는 주촌 서쪽 작산(鵲山: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에 있다. 작산은 속칭 가창산이다. 그곳에 재암(齋庵)이 있는데 작암(鵲庵)이라고 한다.

천성이 청렴간결하여 만년에 선산부사 벼슬을 마치고 돌아올 때 집이 너무도 가난해 항상 칭대(稱貸: 돈을 빌림)하며 자급하였다. 공은 또한 타고난 자질이 개제(愷悌: 얼굴과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한 모양)하였다. 또한 빠르고 용감함이 알려졌고, 말타기와 활쏘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상국(相國: 정승) 최윤덕에게 종군하여 건주위(建州衛: 명나라 영락제 때 여진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행정구역의 하나. 이 건주위 여진이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의 세력이 약한 틈을 타고 세력을 확장해 청을 건설함)를 정벌했을 때 일이다.

도중에 큰 호랑이가 험준한 산을 등지고 굴에 살면서 부근 사람과 가축을 잡아먹으니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그래서 최상공(崔相公)이 능히 잡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할 때 공이 자청해 나서며 ‘지금 북쪽 오랑캐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때에 마땅히 호랑이를 잡아서 실증을 보이겠다’고 말한 뒤 곧장 말을 달려 호랑이굴 앞에 이르렀다. 말을 타고 왔다 갔다 하며 자극하자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나와 말 꽁무니로 뛰어오르려고 덤벼들었다. 공은 재빨리 말머리를 돌리며 활시위를 당겨 화살 한대를 쏘아 죽여버리니 전 군중(軍中)이 탄복했다.

안동부에서 서쪽으로 수십리 되는 곳에 제비원이란 곳이 있는데, 거대한 돌을 다듬어 미륵불상을 새기고 지붕을 덮어 그 높이가 수십백장(數十百丈)이나 된다. 그래서 여기에 오른 사람은 누구나 겁이 나서 감히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했다. 공은 젊었을 때 여기에 올라가 몸을 공중으로 솟구쳐 거꾸로 뛰어내리면서 발끝으로 들보에 붙여서 내려섰다. 그 용감하고 날쌔기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자신은 항상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며 조심했다. 공은 벼슬길에 오를 때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보(陰補)로 고을 원이 되었다가 마침내 현달에 이르렀다. 여러 고을을 거치면서 가는 곳마다 훌륭한 치적을 남겼으며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기니 재식(材識)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공은 세조조(世祖朝)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다.



◆이정이 심은 뚝향나무 ‘경류정 노송’

진성 이씨 종택인 주촌종택(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마당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뚝향나무가 있다. 30여개의 지주가 받치고 있는 이 나무는 ‘경류정노송(慶流亭老松)’으로 그 기록이 전해오는데, 수령이 600년 정도 된다. 1.5m 높이에서 사방으로 퍼진 줄기들의 지름이 13m나 된다. 나무가 차지하는 마당 면적은 50평(165㎡) 가까이 된다.

이정이 영변에 영변진을 설치해 약산산성을 쌓는 대역사를 감독하여 성공리에 완성하고 귀향하는 길에 ‘약산 소나무(藥山松)’를 사랑해 세그루를 가지고 왔다. 그중 하나는 본가인 주촌종택(경류정)에 심었다. 그리고 다른 한그루는 셋째 아들 이계양(호 노송정)이 온혜에 터를 잡을 때 주어 뜰에 심게 하고, 나머지 하나는 사위 박근손 집에 심게 했다.

세 나무 다 잘 자랐으나 노송정종택 나무는 임인년 폭설에 죽어버렸고, 박근손 집 나무는 임진왜란 때 왜병이 뿌리까지 잘라 죽여버렸다.

경류정 노송은 최윤덕의 여진 정벌(1433년) 2년 후 10년생 나무를 가져와 심었다고 보면 그 수령을 대충 산정할 수 있다.

향나무의 일종인 이 뚝향나무는 서울나무종합병원의 보호와 관리를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이정의 후손 이만인(李晩寅)은 ‘나무 심은 지 400년 후 정해년(丁亥年) 12월’에 ‘경류정노송기(慶流亭老松記)’를 남겼는데, 다음은 그 일부다.

‘우리 종가 경류정 옆에 노송나무 한그루가 있어 가지와 줄기가 뱀처럼 꿈틀꿈틀하고 서리서리 넓적하게 얽혀서 임금이 타는 수레의 덮개처럼 되었는데, 그 높이는 두어길이 될까 말까 하니 실로 신기한 소나무다. …공은 젊어서 큰 뜻이 있었으나 음사벼슬로 맴돌아 그 뜻을 펴지 못했다. 그러나 3대가 내려가서 대현(大賢: 퇴계 이황)이 나 우리 동방에 영원한 행운을 가져왔으니 공은 우리 이가의 근본이시다. …원래 솔이란 추운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지조인데 때는 바야흐로 추운 철인지라 군(君)과 나는 아무리 곤궁할지라도 의리를 잃지 말고 만년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더욱 힘써 선조의 지조를 더럽히지 않는다면 이 소나무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서로가 힘써야 할 것이다.’

이 나무를 소재로 한 유림들의 한시 120여수를 수록한 ‘노송운첩(老松韻帖)’ 1책도 전한다.


◆퇴계가 현판 글씨와 기문을 쓴 ‘경류정’

주촌종택의 별당인 경류정은 이정의 후손(고손자)인 경류정 이연(李演: 1492~1561)이 영덕과 의성의 훈도(訓導)를 역임하고 만년에 종가 앞산 바깥쪽 동구에 창건했으나 관리가 어려워 그의 손자 송간(松澗) 이정회가 종가 서쪽 정원수(뚝향나무) 상단에 이건했다.

이 정자는 퇴계 이황이 경류정에 대해 시를 지으면서 기록한 연도가 1556년으로 되어 있어 이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연의 재종숙 되는 퇴계 이황은 정자 이름을 ‘경류정’으로 지어 현판 글씨를 써주며 양각하게 하고 시 한수(題慶流亭)를 지어 주었다. 정자 내부 현판 ‘경류정’은 미수 허목이 전서로 썼다.

종택 사랑채 옆에 있는 경류정은 문중 사람들의 회합장소, 불천위제사 제청, 교육공간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퇴계는 ‘제경류정(題慶流亭)’ 시에서 경류정 주인에게 이곳이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종가의 발전에 힘써주길 당부하며 경류정의 아름다움을 읊고 있다.

‘적선으로 복과 경사가 불어나고(積善由來福慶滋)/ 몇 대 전한 인후함이 온 집안에 넘쳐나네(幾傳仁厚衍宗支)/ 군에게 권하노니 거듭 문호를 힘써 지켜(勸君更勉持門戶)/ 화수회가 위씨 집처럼 해마다 이어지도록 하오(花樹韋家歲歲追)/ 산 아래 높은 정자엔 형세가 아득한데(山下高亭勢入冥)/ 온 집안 사람 함께 기쁨 나누는구나(合宗筵席盡歡情)/ 더욱 어여쁜 명월 가을밤(更憐明月中秋夜)/ 텅 빈 난간 연못이 참으로 맑구나(虛檻方池分外淸)/ 맛난 술 높은 정자에 달빛이 깃드니(美酒高亭月正臨)/ 한 말 술에 백편 시를 읊을 뿐이오(何須一斗百篇吟)/ 작은 연못에 비춘 달은 차가운 거울 같으니(小塘灑落如寒鏡)/ 진실로 은자임을 깨달아 마음이 편하도다(眞覺幽人善喩心). 가정 병진(嘉靖 丙辰: 1556년) 중추(中秋) 전 대사성(前 大司成) 황(滉) 삼가 지음(奉稿).’

이황의 시를 비롯해 경류정을 읊은 여러 사람의 시를 수록한 ‘경류정운고(慶流亭韻稿)’ 1책이 전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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