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달성군 <상>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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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19   |  발행일 2017-05-19 제41면   |  수정 2017-05-19
곳곳에 藥水…“물이 좋으니 미나리 맛도 좋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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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정대리 미나리촌을 지키고 있는 김정복씨.
30여년 정대리 미나리촌을 지키고 있는 김정복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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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천을 암시하는 석각된 한천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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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민에게 무료 약수터로 사랑받는 대림생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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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 알레르기 환자에게 즉효였던 옥분리 옻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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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부터 사용하던 화원읍 남평문씨 세거지 내 고려정.

1995년 경북도에서 대구시로 편입된 달성군(達城郡). 달성군의 음식의 본질과 특징은 뭘까. 이 화두를 제대로 풀기 위해선 비슬산에 올라가서 달성 산하를 제대로 관망해봐야 한다. 분출된 비슬산 지류수를 품어 안은 가창댐. 1959년 8월21일 준공됐다. 86년 4월 높이 45m, 길이 250m로 증축된다. 왜관을 빠져나와 화원유원지로부터 논공, 그리고 구지면에 이르는 동안 무려 20㎞ 구간을 사행(蛇行)한다. 낙동강 521㎞ 중 이렇게 긴 사행을 하는 구간은 달성군 구역이 유일하다. 물의 고장 달성군의 먹거리를 찾아 나섰다.

냉천 백숙식당터 바위에 새겨진 ‘寒泉’
옛 냉천유원지 맛집 명성 뿌리 보는 듯
옻 알레르기 고치는 옥분리 ‘옻약수터’
속병앓이에 탁월한 효험 가창 ‘황물탕’
전국서 몰려와 며칠 묵는 일도 다반사

‘정대미나리 역사의 시작점’ 추병수씨
논 빌려줬다 방치된 미나리가 계기돼
88년 농부 전업 김정복씨 등 속속 가세
재배면적 1만6500㎡ ‘미나리촌’ 명성


◆냉천 약수터

달성군은 ‘수향(水鄕)’이다. 무려 5가지 버전의 약수가 있다.

첫째가 ‘냉천(冷泉)’. 냉천은 ‘한천(寒泉)’으로도 불린다. 냉천(冷泉)이란 마을 이름은 국내에 모두 6곳(달성군 가창면,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전남 구례군 마산면, 경주시 외동읍, 영천시 금호읍, 경남 창녕군 성산면)에 흩어져 있다. 우리말로 풀면 ‘찬샘’. 냉천은 지명이기도 하고 한 약수터의 이름이기도 하다. 대다수 사람은 그 약수터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 냉천이란 지명을 짐작게 하는 약수터가 지금은 사찰로 변한 냉천의 한 유명 닭백숙집에 있다. 그 식당 이름은 ‘찬샘집’. 둘째는 대일리의 ‘대림생수’, 셋째는 행정2리의 산속에 있는 ‘황물탕 약수터’, 넷째는 옥분리에 있는 ‘옻샘(옻약수터)’, 마지막엔 광덕사와 운흥사의 약수다.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파워풀한 닭백숙촌으로 불렸던 냉천유원지 상가는 성주식당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사라져버렸다. 전성기에는 쌍바위, 성주식당, 버들집, 찬샘집, 높은집, 청수장, 냉천장 등 7곳이 운집해 있었다. 스파밸리와 힐크레스트(옛 허브힐즈) 상권과 맞물려 냉천 푸드타운이 형성되면서 닭백숙촌은 지역민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현재 혼자 남은 성주식당 서무 사장만 호시절을 그리워한다.

여기 사장들은 ‘한천교’ 신도나 마찬가지였다. 약수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조상 대하듯 했다. 정월 초하루에는 아무리 추워도 정성을 올렸다. 매년 입춘 때면 자시(밤 11시~새벽 1시)에 나온 물을 기단에 올리고 맘을 정성스럽게 했다.

수소문 결과 그 백숙촌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찬샘집 약수 바위에 한천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3년 전 그 식당을 인수해 대법서원사 도량으로 만든 주지 문수 스님을 만났다. 스님이 이 식당을 인수했을 때는 잘 돌보지 않아 약수가 많이 시들어 있었단다. 다시 정비한 끝에 현재의 1급수 등급의 약수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그에게 한천이란 글씨가 새겨진 약수터 바위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가 약수 원탕 입구를 가려놓은 유리를 치워준다. 상당히 오래전에 새겨진 듯한 ‘한천(寒泉)’이란 해서체 한자가 뚜렷하게 좌정하고 있다.

옥분리에 있는 ‘옻약수터’도 찾았다.

바로 옆 주민인 구성회·이순이 노부부. 이들이 이 옻약수터의 효험을 알려준다. 신약이 없던 시절, 옻 알레르기를 약을 먹지 않고 여기 약물로 치유할 수 있었다. 약수터 왼쪽에 ‘구 약수터’, 바로 오른쪽엔 ‘신 약수터’가 있다. 그 사이에 신단 같은 기단이 마련돼 있다. 한때 여기에는 사찰도 있었다.

약수터를 사용할 때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여기 올 때 절대 고기를 먹어선 안 된다는 것. 근처에는 뱀이 많았고, 자연 고기를 먹은 사람이 오면 뱀의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수터 뒤에 하부산이 있다. 옻나무가 많은데 옻나무 뿌리가 옻샘까지 밀고 내려왔다.

특히 가창면 행정리에는 한때 전국 각처에서 속병 앓는 사람들이 줄지어 몰려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던, 광물 성분이 풍부한 ‘황물탕’이 아직도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 검사를 통해 최고급 미네랄 광천수의 실체가 밝혀지기도 했다. 현재 약수터 옆에 쓰러져 있는 함석 안내판에는 약수 성분 분석표가 또렷하게 적혀 있다. 지금은 무인지경이지만 70년대만 해도 며칠 작정하고 묵으면서 그 물을 장복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고려정을 찾아서

화원자연휴양림 초입에 있는 화원읍 본리리 남평문씨 세거지에는 ‘고려정(高麗井)’이 있다. 500년 이상 묵은 이 고천(古泉)은 문익점(1331~1400)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1812~1874)의 둘째아들 죽헌 문달규의 종택에 있다. 터를 잡은 인산재가 여러 집안에서 사용할 우물이 필요해 일일이 우물이 될 만한 데를 골라 단장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물을 사용하고 있다. 비슬산에 거처하던 일연 스님은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시키기 전, 훗날 인흥(仁興寺)사로 개명되는 인홍사(仁弘寺)에서 11년이나 주석했다. 그 인흥사 자리가 바로 남평문씨 세거지다. 일제 총독부의 ‘조선 보물고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마을에 높이 12척의 3층석탑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03년 출간된 ‘인흥록’에는 인흥마을은 고려 때까지만 해도 절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군에게 많은 사찰이 폐사된다. 인흥사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중기 이후 이런 폐사지는 거의 묘나 집터로 바뀐다. 온갖 길흉사 때마다 통과의례 음식을 장만할 때 이 샘물을 사용했다.

◆정대 미나리

이런 수질 덕분에 청도 한재미나리와 힘을 겨룰 수 있게 된 국내 메이저급 미나리로 등극한 정대미나리. 이젠 화원읍 본리·명곡 미나리촌까지 가세했다.

연초록이 난무하는 4월 중순. 기자는 정대 미나리촌을 찾았다. 청록 정대미나리작목반의 지난 역사를 잘 알고 있고 본인도 상당한 규모의 미나리밭을 갖고 있는 ‘벚꽃집 아저씨’로 불리는 김정복씨(70). 그를 통해 정대미나리의 뒤안길을 챙겨볼 수 있었다.

88년 미나리 키우는 농부로 변신한 김씨. 한때는 대구역전 최고의 포장마차 사장이었다. 달성군 옥포면 출신인 그는 30대 초반에 권리금 500만원을 주고 대구역전에서 ‘복이집’이란 포장마차를 운영했다. 당시 역전에는 딸랑이엄마, 홍합아지매, 기복이부인, 계란아지매 등 7동의 포장마차가 불야성을 이뤘다. 거기서 적잖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승승장구했던 포장마차는 롯데백화점 대구점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된서리를 맞는다. 사업까지 난관에 봉착, 적잖은 돈을 날린다. 2부 인생을 농사로 시작하자고 맘을 먹는다. 아내와 정대 골짜기로 들어와서 자기만의 ‘전원일기’를 쓴다. 당시에는 헐티재로 넘어가는 지방도가 비포장이었다. 93년에야 포장이 끝난다.

그가 들어왔을 때 정대리에는 식당도 거의 없었다. 수제비와 멧돼지바비큐를 잘했던 큰바위집, 정대숲 안에서 칼국수 두부 닭백숙 등을 팔았던 가게 두 곳이 전부였다. 지금은 명물이 된 미나리조차 없었다.

현재 정대마을회관 근처에 자기 논이 있었던 추병수씨(2002년 83세로 작고). ‘추 노인’으로 불렸던 그가 오늘의 정대미나리 농사의 터전을 닦는다. 어느 날 대구시 서북쪽 변두리 미나리밭에서 미나리를 키우던 한 사내가 추 노인을 찾아와 논을 임대해 달라고 부탁한다. 조건도 괜찮고 해서 추 노인은 그 사내에게 논을 넘긴다. 하지만 빚만 지고 사내는 정대를 떠난다.

사내가 떠나자 빈 논을 보고 있던 추 노인은 쌀농사보다 미나리 농사가 훨씬 경제성이 있을 것 같았다. 정대미나리가 인지도를 갖게 된 것은 헐티재로 가는 길이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판로가 괜찮았다. 이에 고무된 주민들이 하나둘 가세한다. 두 번째 농사를 짓기 시작한 사람은 김정복씨. 그다음에 최판용, 최우석, 장일란, 이근만씨 등이 가세를 한다.

16년 전부터 청록 정대미나리작목반이 만들어진다. 11년 전부터 농장별 간이 판매대가 설치된다. 현재 길거리 판매대에서 미나리를 파는 사람은 최우석, 최판용, 김정복, 이말돌, 이영환, 이영만, 우진기, 김재현, 이영태씨 등이다. 재배 면적은 족히 1만6천500㎡(5천평)가 넘는다.

한재는 이른 봄에 한 번 반짝 특수를 누린다. 반면 정대는 2월~4월 초는 하우스용, 4월 초~5월 말은 더 부드러운 노지 미나리를 판매한다.

글·사진=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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